매일신문

[신남희의 즐거운 책읽기] 난세에 답하다/김영수 /알마

운명 극복하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 '사기'속 인물 소개

20년간 '사기'를 연구해온 역사학자 김영수의 '난세에 답하다'를 읽었다. 저자는 꿈과 이상의 기반인 믿음을 상실한 상태를 난세라 보고 사마천의 '사기'에서 난세를 헤쳐 나갈 답을 찾고자 했다.

사마천이 궁형의 치욕을 받은 상태에서 '사기'를 집필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흉노를 정벌하러 갔다가 포로로 잡힌 이릉 장군을 변호한 것에 대한 벌이었는데 다분히 괘씸죄에 가까웠다. 남성의 생식기를 자르는 치욕스러운 형벌인 궁형을 당한 후 사마천이 친구 임안에게 쓴 편지에는 "사람의 죽음 가운데는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를 뽑는 것 같이 가벼운 죽음이 있는가 하면 태산보다 훨씬 무거운 죽음도 있다네"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마천은 보잘것없는 죽음이 아니라 태산처럼 무거운 죽음을 택했다. 궁형의 치욕으로 이미 죽은 육신이지만 정신만은 오롯이 살아 청사에 길이 빛날 사서를 쓰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역사서가 2천여 년 이상 중국 학술계를 이끌어온 절대 역사서 '사기'이다.

움직일 운(運)자를 쓰는 운명(運命)은 움직일 수, 즉 바꿀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본디 숙(宿)자를 쓰는 숙명(宿命)은 바꿀 수가 없다. 운명을 숙명으로 생각하지 않고 '내 운명을 내가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 용기가 생긴다. 사마천은 자신의 운명을 인정했고 그로써 용기를 얻어 '사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다. 진정한 용기는 자신의 운명을 인정하고 그로써 얻은 용기로 세상에 이바지하며 인간으로서의 고귀한 존엄성을 획득하는 데서 생기지 않을까. '사기'는 그런 존엄한 인간의 모습을 여러 인물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사기는 나라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국적이나 신분을 가리지 않는 과감한 외부 인재 기용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아 저렇게 높이 솟아올랐고 바다는 한 줄기의 강도 가리지 않아 저렇게 깊은 것입니다." 추방될 위기에 놓였던 이사가 진시황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아마 이때 진나라가 이사의 간언을 무시하고 진목공 이후 면면히 이어온 '국적 불명, 능력 우대'의 전통을 버렸다면 천하 통일은 불가능했거나 한참 뒤로 밀렸을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도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 제국 굴기의 원동력을 개방성에서 찾았다. 또한 고대 일본의 아스카 문화도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이 없었다면 그 화려한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흥미로운 인물들도 많다. 중국 무협소설의 원조인 '자객 열전'에서 사마천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며, 어떻게 죽는 것이 뜻있는 죽음인가에 대한 확고한 자기 신념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현대 중국인들은 물고기 배 속에 칼을 감추고 오나라 왕 요를 암살한 '어복장검'의 주인공 전제를 가장 독창적인 자객으로 꼽았다고 한다.

사기에는 다양한 유형의 정치가와 개혁가들이 등장한다. 그중 여러 나라를 다니며 개혁을 실시한 개혁 전문 CEO 오기가 실시한 개혁은 수구 기득권 세력이 가지고 있던 일체의 특권을 폐지하고, 왕실 인척의 봉록을 없애 그 돈으로 군대를 키우는 것이었다. 많이 가진 사람에게 많은 세금을 내게 하고 군대에 가지 않는 귀족을 군대에 보냈다. 특권을 누리는 만큼 사회적 의무도 다하라는 요지였다. 2천여 년 전 오기가 실행했던 개혁의 요지는 21세기인 지금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다.

장작더미에 누워 과거의 치욕을 생각하며 곰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한다는 뜻의 와신상담, 웃지 않는 미인 포사를 웃게 하기 위해 봉화를 올리다가 다급할 때 진짜로 올린 봉화에 아무도 달려오지 않아 적에게 살해되는 유왕 이야기도 재미있다. 그 외에도 사기에는 인간경영 철학과 경제 철학, 흥망을 좌우하는 인재의 조건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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