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산사랑 산사람] 경기도 파주 감악산

의적 꿈꾸었던 임꺽정, 관군 피해 절벽 옆 동굴로 숨어들다

황해도의 장길산(張吉山), 충주의 홍길동(洪吉同, 소설이 아닌 실제 인물), 양주의 임꺽정. 이른바 조선시대 3대 도둑이다. 이들은 모두 실존 인물이었으며 소설로 쓰여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소설에서 워낙 미화된 덕에 의적으로 칭송받기도 했지만 본래 의(義)와 적(賊)은 양립 불가의 개념이다. 소설과 달리 그들은 관아와 부자뿐만 아니라 민가도 노략했으며 밀고자는 잔인하게 보복했다. 영남대 박홍규 교수는 '의적, 정의를 훔치다'라는 책에서 '도적들은 실제로 의롭지 않다'고 말하고 '봉건체제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소망이 작품에 투영된 것'이라고 정리한다. 수호지(水湖志)에 양산박, 로빈후드에 셔우드 숲이 있다면 경기, 황해도에는 감악산, 구월산이 있다. 임꺽정의 행적을 찾아 감악산으로 떠나보자.

16, 17세기는 도적의 시대였다. 그동안 관학, 훈구파에 의해 유지되던 사회체제가 사림의 성리학적 질서로 개편되면서 조선사회는 격랑 속으로 빠져든다. 4대 사화로 전국은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변방 오랑캐였던 청이 임진강을 건너와 삼전도의 굴욕을 강요한 것도 이때 일이다.

임꺽정의 등장은 이런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를 전제하고 있다. 사실 임꺽정의 주 무대는 황해도 구월산이었다. 당시 황해도는 치안공백 지대였다. 하층 민중들의 지지를 업은 임꺽정은 급속히 세력을 확장했다. 성남, 양주, 파주 일대까지 악명을 떨쳤으며 서울 한복판 청계천에서 관군과 일전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과 평안도 잇는 관문, 산적들 은신처=서울과 평안도를 잇는 관문인 파주는 고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또 화악산, 명지산 같은 험한 산들에 둘러싸여 산적들의 은신처로는 최고의 입지였다. 감악산(675m)은 험하기로 소문난 경기5악(관악산'화악산'감악산'운악산'송악산) 중의 하나.

들머리 감악산휴게소가 있는 설마리는 1951년 4월 영국군이 중공군을 맞아 싸운 곳이다. 이 전투에서 글로스 대대는 중공군 3대 사단에 포위된 극한 상황 속에서도 진지를 사수해 중공군의 남하작전을 3일간 지연시켰다. 중공군이 파주를 넘어 서울로 진격했을 때 유엔군들은 후방으로 대피하고 난 후였다.

등산로는 보통 감악산휴게소-까치봉에서 정상으로 올라 임꺽정봉을 돌아 만남의 숲-범륜사로 내려오는 코스가 주류를 이룬다.

뜻밖에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평탄했다. '악(岳)자 돌림' 5형제 중 가장 순한 산세를 지닌 듯하다. 참나무 숲길과 암릉 길을 몇 차례 오르다 보면 바로 까치봉이다.

이제 산은 전망을 펼쳐 보인다. 멀리 북쪽으로 최근 폭우에 물이 불어난 임진강이 붉은 물빛으로 흐른다. 그 너머로 여러 겹의 능선이 파랑(波浪)으로 물결친다. 날씨가 갠 날에는 개성의 송악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고 한다.

까치봉에서 소나무 숲길을 걸어 30분쯤 오른다. 아담한 감악산 정상석이 일행을 맞는다. 우람한 근육을 앞세운 암릉들이 곳곳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바위에서 비치는 은은한 회색빛 색감이 정오 뙤약볕에 뚜렷하다. 이곳 바위들이 감물처럼 회색빛을 띤다고 해서 산 이름도 '감'(紺)자가 붙었다.

◆화악'명지산 등 경기북부 명산들 한눈에=정상은 최고의 군사요충지답게 최고의 조망을 펼쳐 놓았다. 북동쪽 전곡 너머로 금학산'복주산이, 동으로 소요산'화악산'명지산이 산너울로 일렁인다.

정상에는 '빗돌대왕비' 또는 '설인귀비'라고 부르는 고비(古碑)가 있다. 규모와 형태가 진흥왕순수비와 비슷해 제5의 순수비일 가능성이 제기되자 1982년 동국대 학술팀이 조사에 나섰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판독의 근거가 되는 비문의 훼손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양주에서 백정 신분으로 태어났던 임꺽정은 관리들의 탐학과 신분차별을 견디지 못해 하층민들을 규합해 일약 도적떼의 수괴가 되었다. 교육을 받지 못하고 신분이 미천한 탓에 그는 정치적 리더십을 가지지 못했고 일개 도적으로만 머무르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에 몰락한 양반이나 서얼들이 주도한 민란에서는 활빈당(活貧黨), 살주계(殺主契), 대동계(大同契) 같은 정치 결사체들도 나타나고 신분제 타파, 부패관리 처단 같은 정치구호가 등장한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천혜의 은신처 '임꺽정굴' 옆에 두고도 못찾아=임꺽정봉 밑에는 '임꺽정굴'이 있다. 굴은 한눈에 봐도 천혜의 은신처임을 알 수 있다. 입구는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지만 내부는 장정 10여 명이 기거할 만한 공간이 숨어 있다. 더구나 굴은 절벽과 바로 연결돼 줄을 타고 절벽 밑으로 긴급탈출이 가능하다. 이중 잠금장치인 셈이다.

네이버 등 포털에 나오는 임꺽정굴 사진은 바로 위 큰 바위와 혼동하고 있다. 안내판이 바로 앞에 서있어 대부분 등산객들도 그 바위를 임꺽정굴로 잘못 알고 내려간다. 임꺽정굴은 절벽 바로 앞에 있으며 옆에 두고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교묘히 감춰져 있다. 명종 연간, 관군에 쫓기던 그는 추적을 피해 이곳에서 은신했었다고 전한다.

하산 길은 범륜사 쪽으로 향한다. 얼굴바위를 돌아 '만남의 숲'을 지나면 곳곳에 숯가마 터가 널려 있다. 좋은 교통에 넉넉한 숲, 숯막의 입지로는 최적의 조건이다. 1960년대까지 이곳에서는 목부들이 드나들며 숯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사실 화전(火田)이나 숯가마는 최하층 민초들의 삶의 수단이다. 관아의 횡포에 터전을 잃은 유민들이 마지막으로 찾아드는 곳이다. 어쩌면 이 숯가마 터의 주인공들은 임꺽정 무리의 흔적인지 모른다. 이들은 관군에 쫓기는 도적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주고 산 아래의 동향을 귀띔해 주었을 것이다. 혈기방장한 일부 젊은 화부(火夫)는 도적 무리들을 따라 관아습격이나 공물털이에 나섰는지 모른다.

이제 일행은 범륜사로 내려선다. 경내엔 동양 최초 백옥(白玉)관음상이 높이 서 있고 대웅전 상량엔 수많은 기원들을 담은 등들이 걸려 있다. 그 뒤로 선정인(禪定印) 수인(手印)을 한 부처가 말없이 중생 세계를 내려 보고 있다.

16세기 조선은 도둑과 비도둑의 경계가 애매했다. 산속에서 봇짐이나 털던 산적들이 좀도둑이었다면 관료, 왕족들의 부패는 조직적이고 전국적이었다. 생계형 도둑과 수탈적 도둑, 부처님은 어떤 기준으로 옥석(玉石)을 가려냈을까.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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