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그리운 것들은 등 뒤에 있다

백령도의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오지 않으면 해무(海霧)가 끼었는데 오랜만에 햇빛을 본다고 했다. 마중 나온 까나리여행사의 관광버스는 용기포 선착장에서 대경언론클럽 회원 30여 명을 싣고 행선지 설명도 없이 무조건 달린다. 말 하나마나 갈 길도 뻔하고 말 해 봐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투다.

얼마 달리지 않아 진촌리 사곶해수욕장에 내려 주었다. 이곳은 규조토로 다져진 천연 해수욕장으로 해변의 용도는 다양했다. 비상시에는 비행기 활주로로 쓰이고 평소에는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여느 바닷가와는 달리 대형버스가 달려도 바퀴자국이 나지 않는다. 이곳 모래는 물기를 머금으면 콘크리트에 버금갈 정도로 단단해져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세계에서 이런 해수욕장은 나포리와 이곳 단 두 곳뿐이라고 한다.

사곶해수욕장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으니 백령도에 와 있다는 사실이 드디어 실감이 난다. 백령도는 꼭 한 번 가보리라 마음먹고 있었지만 실행이 쉽지 않아 항상 끝내지 못한 숙제처럼 찜찜하게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사곶해수욕장엔 하늘과 바다, 단단한 갯가 사장 말고도 숨은 명물이 또 하나 있었다. 버스기사가 오른쪽 골목 안으로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자 우린 유치원생 소풍가듯 줄지어 따라갔다. 임시 막사 비슷한 판넬 건물로 들어갔다. 그곳이 바로 백령도의 대표 맛집인 사곶냉면(김옥순'032-836-0559)집이었다. 변변한 간판도 반갑게 맞이하는 이도 없었다. 어쩌면 백령도는 무뚝뚝과 무언(無言)의 천국이다.

냉면이 나오기 전에 네 사람 앞에 감질날 정도의 작은 접시에 돼지수육이 나왔다.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더니 바로 그랬다. 이집은 90㎏ 전후의 1년 미만짜리 돼지고기만을 내기 때문에 맛이 좋다고 한다. 한 점 입에 넣어보니 별로 씹지도 않았는데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입안은 비었다는 신호를 보내온다. 제주 똥돼지의 '형님'으로도 손색이 없다.

수육 맛을 못 잊어하는 입맛이 냉면을 보더니 다시 반색을 한다. '본처 죽고 3일 만에 장가드는' 형상이다. 이집 냉면은 고명이래야 달걀 반쪽과 오이 썬 것밖에 없는데 그렇게 담백하면서 맛이 있다. 도시의 평양식 냉면이 야하게 화장한 여인의 얼굴이라면 백령도 냉면은 루주만 살짝 바른 맨얼굴 그대로다. 그런데도 멋이 있고 기품이 있다.

육수의 비법을 알아보려고 주방으로 들어갔더니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마누라가 있느냐"고 물었다. "마누라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했더니 "웬만하면 한 사람 더 들이지"라고 농을 걸어 왔다. 이집 육수는 돼지 뼈를 푹 고은 국물에 다시마 우린 물을 부어 생강과 깨를 넣었으며 메밀 반죽에는 찹쌀가루를 섞어 오래 치댄 것이라고 했다.

밤에는 갑자기 해무가 하늘을 덮어 내일 오후로 예정된 출항이 근심스러울 정도였다. 밤바다의 안개가 얼마나 짙게 내리는지 별구경 나온 산책길이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속을 걷는 듯했다. 이윽고 '밤안개'란 가요의 한 구절이 입속을 맴돌더니 연상 작용인지는 몰라도 김추자의 '무인도'로 이어져 밤안개 속의 무인도에는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만 애처로웠다.

신발 벗고 걷는 콩돌 해변 언덕에는 솔잎동동주를 팔고 있었다. 술 한 되 6천원이니 싼 값은 아니지만 '참새 방앗간' 원리에 따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술맛 보다는 이곳 풍광이 맛을 내주고 동료들이 건네주는 정 담긴 술잔을 출렁이는 파도가 담긴 바다란 큰 잔과 몇 번이나 '짠'하고 입을 맞추었다. 바다는 참 좋다. 백령도 바다는 더 좋다.

우린 오후 1시 배로 돌아가야 한다. 두메칼국수(이영숙'032-836-0245)집에 들렀다. 1개 1천원짜리 짠지 떡 2개와 4천500원하는 칼국수가 나왔다. 양도 많지 않았고 보기에도 세련미 전혀 없는 두메산골의 음식이었다. 콩밭을 맨 뒤에 새참으로 먹으면 딱 좋을 음식이었지만 맛은 만만찮았다. 들깨를 푼 국물에 굴을 삶아 넣었다는데 칼국수로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묘한 맛이었다.

그리운 것들은 모두 등 뒤에 있다. 그래서 두고 떠나 올 땐 자꾸 뒤돌아 보이는 법이다. 백령도가 그렇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