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통일의 주역인 화랑과 신라귀족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훗날 나라 위기때 의병(義兵)으로, 경주 최 부자와 같은 베품과 나눔으로, 상주에서의 민간 의료구휼 활동으로 나타났다. 상주 13개 문중이 설립한 조선조 최초 사설 의료원인 '존애원'(存愛院)은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약 200년의 의료 구휼, 400년간의 경로잔치 개최 및 교육사업을 이어온 존애원의 활동은 많은 유림들이 기꺼이 동참한 '공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널리 남에게 베풂이 나라에 보탬이 되게 하는 일'(施普於物 有補於國)에 상주 유림이 뜻을 모은 것이다.
◆200년 이어온 인술(仁術)의 사설 의료활동
"예로부터 상란(喪亂)이 없는 때가 없었으되, 사람과 가축이 함께 없어짐이 어찌 오늘과 같으랴." "온 나라 백성이 거의 살 바를 잃었으니 춘궁기가 돌아옴에 굶어 죽는 자가 적병의 칼날에 죽는 자보다 몇 배나 많았다." "세상이 어지럽고 흉년이 들어 양민들이 모두 도둑이 되었으며'''왜적의 손에 죽고, 역병(疫病)에 쓰러지며 굶주려 죽고, 감옥에서 죽어 인류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니 통탄을 금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정유재란(1592~1598)으로 조선의 산하는 비참했다. 선조실록, 상주 의병장 조정(趙靖)의 '임란일기' 등에는 그 실상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백성들은 전염병과 각종 질병으로 약 한 첩 못쓰고 죽어갔다. 상주 북천전투에서도 의병 등 상주민 800여 명이 전원 산화했다. 이에 상주는 복호(復戶'조세감면)조치라는 은전을 받았다. 그러나 전쟁 뒤 남은 것은 지옥 같은 비참함뿐이었다.
왜란의 뒤끝인 1599년 가을, 상주에서는 송량 김각 정이홍 윤진 이전 이준 강응철 김광두 정경세 등 남촌(청리''외남'공성'내서 등)지역 13개 문중 24명(후일 30명)이 재물을 모아 만든 '낙사계'(洛社稧)를 바탕으로 현존 자료상 우리나라 의료 사상 처음이자 조선조 최초 사설 대중의료기관인 존애원이 창설됐다. 질병으로부터 '향토민은 향토민이 구하자'는 취지에서다. 3년 뒤(1602년)엔 자체 건물인 '존애당'(存愛堂)도 갖췄다. '본심을 지켜(存心) 만물(남)을 사랑(愛物)한다'는 뜻을 지닌 중국 정자(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物)에서 따왔다.
진료는 관에서 물러나 처가인 상주에 머물던 유의(儒醫) 성람(成灠'1556∼1620)이 맡았고 운영은 계원들이 내다판 약재 이윤 등으로 충당했다. 존애원 앞 넓은 들에 약초를 재배했는데 현재 '약배이들'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존애원지' 발간(2005년)에 참여했던 경북대 사학과 한기문 교수는 "당시 지방에는 각 도에 파견된 몇 사람이 지역민들에 대한 치료와 약재 공납 등을 했는데 그 임무 수행에 무리가 따랐다. 지방의 의료환경은 극히 소홀하고 열악했다. 임란은 최악의 의료상태를 야기했다"고 했다.
존애원 김정기(80) 원장은 "기록은 없지만 존애원에는 상주 외 다른 지역에서도 치료나 진료를 받으러 왔을 것"이라면서 "존애원은 남녀노소 신분상 차별 없는 인애(仁愛)와 동포애, 생명존중 정신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존애원 보존회 김홍준(55) 회장은 "상주 선현들은 고귀한 동포애와 인도주의 정신을 보여주었다"고 말했고 존애원 손재현 유사는 "오늘날로 치면 우리 선조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의료사업으로 실천한 셈"이라고 말했다.
◆인술을 넘어 경로효친과 가르침까지
1599년 '존애원기'(存愛院記)를 쓴 이준(李峻)은 사람의 '인'(仁)이라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어지지 않는 한 존애원의 의료활동이 영원할 것으로 바랐다. 그러나 의료활동은 200년이 안 돼 무너졌다. 1782년의 상주지역의 한 향민에 의한 무고(誣告) 때문이었다. 누명을 벗은 1797년까지 16년간 진료가 중단됐다. 혐의도 벗고, 실상을 알게 된 정조(正祖)로부터 "크도다, 이 계여. 나도 이에 들리라"(大哉比稧 吾當入之)라는 전례 없는 칭송의 전지(傳旨)도 받았으며, 계명칭도 '대계'(大稧)로 바뀌었으나 결국 이 무고로 재산과 의료사업 기반은 이미 무너져 맥이 끊겼다.
존애원은 그러나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살아남았다. 오늘날 경로잔치에 해당하는 '백수회'(白首會)가 그것이다. 1607년부터 20세기까지 이어진 백수회는 매년 많을 때는 100명 넘는 노인들이 모였다.
존애원 창설을 주도했던 정경세(鄭經世'1563∼1633)는 "고을에 연세 많은 분들이 혹 소문을 듣고는 술을 가지고 왔으며'''종일토록 기분 좋게 즐기며 밤까지 계속됐다"는 내용의 첫 백수회 정경을 시로 남겼다. 백수회에서는 즉석에서 시를 짓는 '백장회'(白場會)도 겸했는데 여러 작품들이 남아있다. 존애원에서는 관례(冠禮'성인식)도 열려 1908년까지 이어졌다. 특히 70세 이상 노인에게 새해 올린 음식인 세의(歲儀) 혹은 세찬(歲饌) 제공은 1940년까지도 지속됐다. 백수회는 경로효친의 예절교화의 장(場)이었다
서당이자 배움터 역할도 했다. 1747년 간행된 상주지역 역사기록인 '상산지'(商山誌)는 존애원을 서당(書堂)에 포함시켰다. 존애원 손재현 유사는 "1950년에는 존애원을 단소(壇所'제사를 지내는 곳)로 승격시켰는데 이는 존애원의 서당'서원으로서의 역할을 방증하고 있다"고 전했다.
경북대 권태을 명예교수는 "존애원의 설립 목적은 의료기관 운영에만 그치지 않고, 측은지심을 발휘하여 선비의 도리를 완성함에 있었다"면서 "선비도(道) 실현을 추구해온 상주의 향토애가 존심애물 사상으로 집약됐다"고 평가했다.
◆400년 만에 다시 살아난 존애원
상주시 청리면 율리 353번지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9호 존애원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한동안 세상에서 잊혀지는 듯했다. 그러다 13개 문중(무송 윤씨가 빠져 현재 12개) 후손들의 노력으로 1956년 존애원사적인 '낙사휘찬'(洛史彙纂)이 발간됐고, 1993년 2월에는 존애원이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지정됐다.
2005년에는 처음으로 '존애원 의료시술 재현행사'가 열린 것을 계기로 2009년부터 해마다 재현행사가 개최됐고 올 10월에도 학술세미나와 한약재 전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400년 전 상주 선조들의 박애와 생명존중 정신을 되새길 계획이다.
아울러 2007년 존애원을 창설했던 낙사계(현 대계) 참여 후손들을 중심으로 '존애원보존회'가 만들어졌다. 또한 후손들의 노력으로 존애원 기록을 새롭게 모아 정리한 자료집인 '존애원지'가 2005년과 2007년에 발간됐다.
이들 후손들은 지금도 해마다 음력 2월 10일 존애원에 모여 존애원(대계) 취회를 갖고 1년 결산 및 임원선출(존애원장'존애원 유사, 대계 도감'대계 유사), 그리고 한 해 주요 행사에 대한 논의를 통해 문중 간 친선을 다지고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존애원 페스티벌 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던 김남일 경희대 한의대 교수는 "존애원이 설치되어 운영된 시기의 상주지방의 유의들과 의서, 약재 등에 대한 고찰을 통해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존애원의 활동상에 대한 정확한 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존애원의 강경수 유사는 "존애원은 왕(정조 임금)으로부터도 칭송받았을 만큼 의료원'예절교화장'강학소 구실을 4백 년 넘게 이어온 현장이다"며 "앞으로 당초 설립 취지에 맞춰 의료계 전체가 참여하는 행사가 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존애원 손재현 유사는 "여러 문중이 참여한 단일 계조직이 400년 넘게 유지되고 있는 경우는 유례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상주시는 은척에 조성 중인 한방산업단지의 활성화와 상주의 한방 메카화 추진과 연계해 존애원 재현 행사를 지원하고 있다. 정인열기자 oxen@msnet.co.kr
◆존애원 참여 13개 문중
진양(晋陽) 정(鄭)씨, 흥양(興陽) 이(李)씨, 여산(礪山) 송(宋)씨, 영산(永山) 김(金)씨, 월성(月城) 손(孫)씨, 청주(淸州) 한(韓)씨, 상산(商山) 김(金)씨, 재령(載寧) 강(康)씨, 단양(丹陽) 우(禹)씨, 회산(檜山) 김(金)씨, 무송(茂松) 윤(尹)씨, 창녕(昌寧) 성(成)씨, 전주(全州) 이(李)씨. (현재 무송 윤씨는 참여하지 않음)
◆낙사계 주요 조약
진덕근행(進德謹行'덕으로 나아가고 행동을 삼간다), 과실상규(過失相規'과실을 서로 직언으로 간하여 고친다), 성애상접(誠愛相接'성심과 사랑으로 서로를 맞이한다), 환난상구(患難相救'질병이나 어려움을 서로 구제한다), 유경상하(有慶相賀'좋은 일은 서로 축하한다), 유상상조(有喪相弔'상사가 있을 때는 서로 조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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