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중가요 가사, 청소년 유해 매체물 결정 논란

"독재시절도 아니고 시대착오 발상" "그렇다고 대놓고 술·담배 미화

청소년 유해 매체물 판정을 받은 십센치와 노래
청소년 유해 매체물 판정을 받은 십센치와 노래 '아메리카노' 비스트와 노래 '비오는 날엔' 2PM과 노래 '핸즈 업' 노라조와 노래 '포장마차'

'아메 아메 아메 아메 아메리카노 좋아 좋아 좋아~.'

인디밴드 '십센치'(10㎝)를 스타로 만든 노래 '아메리카노'의 한 구절이다. 독특한 후렴구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아메리카노'는 커피 붐과 맞물려 요즘 가장 많이 회자되는 대중가요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최근 십센치의 인기에 제동을 거는 일이 터졌다. 잘나가던 노래 '아메리카노'가 청소년 유해 매체물로 지정된 것. 청소년 유해 매체물로 지정된 음악은 청소년보호시간대(평일 기준 오전 7~9시, 오후 1~10시)에는 방송이 금지되며 인터넷에서 다운로드 받을 때는 성인인증을 거쳐야 한다. 또 음반을 판매할 때는 '19세 미만 청소년 판매금지' 표시를 해야 한다. '아메리카노' 인기를 타고 승승장구하려던 십센치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내려진 청소년 유해 매체물 판정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셈이다. '아메리카노'를 계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청소년 유해 매체물 지정 논란을 들여다봤다.

◆여성가족부에서 추진

대중가요에 대한 청소년 유해 매체물 결정 업무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아니라 여성가족부 소관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에 대한 사무를 관장하는 까닭에 '왜 여성가족부지?'라는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여성가족부가 청소년 유해 매체물 지정을 담당하는 이유는 청소년보호법에 따라 매체물 유해성을 심사하는 업무를 여성가족부가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청소년보호법 시행령을 보면 청소년 유해 약물에 관한 부분이 있다. 청소년들의 유해 약물 사용을 조장할 가능성이 있으면 유해 매체물로 판정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음악을 유해 매체물로 지정할 경우 사회적 반발도 예상되지만 청소년 보호가 주어진 일이기 때문에 유해 매체물을 선별해 지정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1천500여 곡 유해 매체물로 지정

'아메리카노'에서 문제가 된 가사는 '이쁜 여자와 담배 피고 차 마실 때' '다른 여자와 키스하고 담배 필 때'라는 부분이다. 여성가족부는 지난달 16일 "담배 피우는 것을 미화하고 건전한 교제를 왜곡할 우려가 있어 유해 매체물로 판정했으며 해당 가사를 바꾸면 방송이나 CF 활동을 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청소년 유해 매체물로 지정된 곡은 '아메리카노'만이 아니다. 그룹 2PM의 '핸즈 업'(Hands Up)을 비롯해 장혜진의 '술이야', 옴므의 '밥만 잘 먹더라', 장기하와 아이들의 '나를 받아주오', 김현중의 '제발', 백지영의 '아이캔 드링크', 노라조의 '포장마차', 비스트의 '비오는 날엔', 이장희의 '한잔의 추억' 등 1천500여 곡이 청소년 유해 매체물 판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소년 유해 매체물로 지정된 노래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술과 담배라는 단어가 사용된 문구. ▷'핸즈 업'은 '술 한잔을 다 같이 들이킬게' ▷'술이야'는 '난 늘 술이야 맨날 술이야' ▷'밥만 잘 먹더라'는 '친구들과 술 한잔 정신없이 취하련다' ▷'제발'은 '퍼지는 담배 연기 사이로 너를 흩어지게 해도' ▷'한잔의 추억'은 '마시자 한잔의 추억 마시자 한잔의 술 마시자 마셔버리자'가 문제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반대 VS 찬성

여성가족부는 가사에 술과 담배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청소년 유해 매체물로 판단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이다. 노래 가사의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해 술과 담배 등을 권하거나 조장하는 것에 해당할 때 지정한다는 것. 하지만 비판의 목소리는 좀처럼 숙지지 않고 있다. 반대 입장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과잉 규제로 창작 의욕을 떨어뜨려 문화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청소년 유해 매체물 지정은 군부독재시절 금지곡을 연상시키는 시대착오적인 제도"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히 '아메리카노'의 경우 발매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유해 매체물로 지정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누리꾼들은 "이제 와서 규제하는 저의가 무엇이냐. 심의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기준이 없다" 등 온라인 게시판을 통해 성토의 글을 쏟아내고 있다.

유해 매체물 지정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서진영(31'여) 씨는 "노래가 좋으면 어떻게든 내려받아 듣는다. 아메리카노의 경우 이미 청소년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내려받아 듣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여성가족부가 내세운 유해 매체물 지정 효과는 거둘 수 없다"고 말했다. 형평성의 원칙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대학생 김우영(26) 씨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이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허용되고 노래에서는 금지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반대 입장에 맞서 청소년 유해 매체물 지정을 찬성하는 입장도 있다. 임진우(44) 씨는 "청소년들은 감수성이 예민해 노래 가사에도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공개적으로 술과 담배를 권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확산되는 가요계 반발

청소년 유해 매체물 지정에 가요계의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달 25일 그룹 비스트 소속사 큐브엔터테인먼트는 여성가족부를 상대로 서울행정법원에 청소년 유해 매체물 판정 통보 및 고시 결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큐브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비가 오는 날엔'의 가사 가운데 술과 관련된 부분은 '취했나봐 그만 마셔야 될 것 같애'가 유일한데 이는 음주를 조장하거나 미화하는 것과 관계가 없다. 곡의 주제는 음주와 무관한 이별 얘기다. 청소년 유해 매체물 결정이 작가의 창작 의지를 심각하게 위축시키고 있으며 다른 곡들과의 형평성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소송을 냈다"고 설명했다.

비스트에 앞서 SM엔터테인먼트도 여성가족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속 가수 더 발라드의 노래 '내일은…'이 '술에 취해 너를 그리지 않게'라는 가사로 인해 청소년 유해 매체물 판정을 받았기 때문.

가수 옥주현도 '청소년 유해 매체물 심의 기준'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옥주현은 지난달 31일 자신의 트위터에 "배꼽 보이는 옷도 안 되고 갈색 머리도 안 돼서 흑채 뿌리고 무대에 올랐던 12년 전보다 요즘이 더 엄하다고 들었다"며 대중 문화계에 불어닥친 검열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

◆대안은 자율심의

SM엔터테인먼트가 여성가족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승소했다. 지난달 25일 서울행정법원은 "술은 마약류나 환각류와는 달라 노래 가사에 문구가 포함돼 있다고 해서 유해성이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유해 매체물 결정을 취소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SM엔터테인먼트의 승소에 따라 여성가족부의 심의 기준에 대한 적절성 여부가 도마 위에 올랐다. 이에 따라 여성가족부는 최근 여론을 일부 수렴하는 태도를 보였다. 여성가족부는 술'담배 등을 노골적으로 조장하는 경우에만 규제토록 할 방침임을 밝힌 데 이어 '12세 미만 이용 제한' 등급을 신설해 연령별로 차이를 둬 규제하겠다는 등의 제도 개선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여성가족부 심의 자체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자율심의다. 강태규 대중문화평론가는 "현 심의제도는 시대와 동떨어진 느낌이다. 차라리 가요계 종사자들에게 심의를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음악을 전파하는 PD들의 자체 심의제도 시행이다. 올바른 선곡 능력을 갖춘 음악 PD들이 자체적으로 판단을 내리면 된다. 문제가 될 정도의 노래는 충분히 선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말했다.

한편 여성가족부는 자율심의에 대해 "궁극적으로 자율심의로 전환되어야 하지만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 당장은 어렵다.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입장이다. 또 여성가족부는 "심의기준이 추상적이라는 비판이 있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명료한 기준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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