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야구의 역사에서 1919년을 기준으로 이전의 야구시대를 데드볼 시대라 하는데 이는 공 자체의 반발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타구가 멀리 날아가지 않으니 타자들은 단타 위주의 정교한 타격에 치중했고 도루와 주루를 곁들여만 득점률을 높일 수 있는 빠른 스몰볼의 야구를 해야만 했다.
이 시기 후반에 등장한 야구 천재가 바로 타이콥(T.Cobb)이었다.
그는 24년의 선수생활을 통해 12번의 타격왕을 차지했으며 4번이나 4할의 기록을 남겼다.
1928년 41세의 나이로 은퇴한 해의 타율이 0.323였다. 당시 그는"이 정도도 못하면 야구 할 생각은 하지 마라"는 은퇴사를 남겼다.
그는 선수 시절 90여 개의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수립했다. 4천191개였던 최다안타는 57년 만에 피터 로즈에 의해 경신되고, 리키 핸드슨이 그의 2천245득점을 넘기까지 무려 73년이 걸릴 만큼 야구 역사상 최고의 호타준족이었다.
그러나 타이콥은 불세출의 기량을 아낌없이 그라운드에 쏟아냈음에도 월드시리즈 우승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가 22년간이나 뛴 디트로이트 타이거즈가 세 번의 월드시리즈에서 모두 패한 것이다. 역사상 메이저리그 통산 14번밖에 없는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한 1909년(타율 0.377, 타점115개, 홈런 9개)에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 패해 우승컵을 안아보지 못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공부를 멀리하면서 16세에 집을 뛰쳐나왔던 타이콥은 이듬해 1905년 디트로이트 입단 첫해에 부친이 모친의 총에 맞아 숨지는 불우한 가정사에 영향을 받아 모질고 거친 성격으로 변했고 동료들이나 관중들과도 다투어 끊임없이 악동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러나 번트를 한 후에 전력 질주해 1루수를 받아버리는 야수 같은 플레이와 관중의 야유에도 화끈하게 대응하는 주저 없는 표현에 관중몰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스파이크 날을 세우고 베이스로 돌진했던 그는 "야구는 전쟁과 별반 차이가 없다. 다른 선수들이 자신을 보고 벌벌 떨게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스포츠맨십이다"라며 불 같은 공격야구를 펼친 전사였으나 덕분에 외톨이가 되어 말년에는 친구가 없었다.
얼마 전 고인이 된 장효조는 그런 전사 타이콥을 좋아했다.
필자가 기록원으로 더그아웃에서 함께한 6년 동안 장효조는 타이콥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경기 전 글러브와 스파이크를 손수 닦기를 즐겨했던 장효조는 기름이 얼룩진 헝겊으로 연신 스파이크를 손질하면서 "야구는 정말 (타이콥처럼) 화끈하게 해야돼"라며 연신 되뇌곤 했다.
경기 전 한정된 타격연습 시간을 넘기면서도 후배들의 원망스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도 결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승부사적 기질이나 최고로서의 당당함마저도 타이콥을 닮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돌이켜보면 '타격의 달인'이란 명칭을 얻은 장효조의 야구인생은 타이콥과 많이 닮았다.
최종문 야구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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