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탐색 끝에 3년의 공생애를 살았다는 것은 예수와 비슷하고, 늙은 아버지와 젊은 엄마 밑에서 불우한 처지로 태어난 것은 공자와 비슷하며, 생애의 어느 시점에 운명적 힘에 의하여 계시를 받았다는 것은 무함마드와 비슷하며, 시대를 어지럽혔다는 사회적 죄목으로 참형을 받은 것은 소크라테스와 비슷하고, 기존의 사유체계와 가치관을 완전히 뒤엎는 새로운 논리적 사고를 하였다는 측면에서는 싯탈타와 통한다."(김용옥, '도올심득 동경대전', 2004년)
동학(東學) 창시자 수운 최제우(1824~1864). 그는 1864년 4월 15일 오후 2시쯤 대구 남문 밖 관덕당 뜰에서 참수돼 41세 짧은 생을 마쳤다. 노비 해방과 신분제 철폐로 계급'신분 타파, 재가 금지 등 봉건적인 구시대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평등세상을 열고자 했다. 개벽을 바란 그의 열망은 1894년 동학 농민혁명과 갑오개혁의 씨앗이 됐다. 그는 위대한 선각자였다.
◆하늘, 백성과 소통한 개벽의 동학
'등불이 물 위에 빛나고 있으니 온 세상을 밝힐 것이요, 기둥이 제법 말랐으니 떠받치는 힘 넉넉하다.' 뼈가 부러지는 혹독한 고문 속 수운이 마지막 심문(2월 20일) 날, 도통을 받은 최시형에 전해준 칠언절구다. 자신은 죽음으로 동학을 떠받치는 기둥이 될 테니 최시형이 동학으로 세상을 밝히라는 바람이었으리라. 또 다른 칠언절구 '용담의 물이 흘러 그 물줄기 바다를 이루고, 구미산에 먼저 온 봄 온 세상을 꽃피우리라'고 한 바람도 같았다.
경주 현곡면 가정리 구미산 자락 용담정에서 시작된 동학. 농민혁명을 통해 이 땅에 새 역사를 만들었고, 수운의 뒤를 이은 최시형과 일제강점하 손병희에 의해 더욱 깊게 뿌리를 내렸다.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죄로 생을 마친 수운의 동학으로 하늘은 다시 열렸다. 환웅 고조선 개벽에 이은 '다시개벽'이었다.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라 노래했던 것처럼. '다시개벽'은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태평스럽게 살 수 있는 이상향이었으리라.
그는 37세, 1860년 4월 5일 용담정에서 깨달았다. 부인 박씨의 고향인 울산 여시바윗골 생활, 경남 양산 천성산 내원암(47일)과 적멸굴(49일)에서의 기도 등 20년에 걸친 수련 결과였다.
그는 환웅이 환인에게 천부인(天符印)을 받았듯, 상제(하늘님'한울님)에게 선약이란 영부(靈符)와 21자 주문을 받아 동학을 창시했다. 경주 출신 천재학자 김정설은 이날을 "정말 어마어마한 역사적 대사건"이라 평했다.
'가련하다 가련하다 아국운수 가련하다, 전세임진(前世壬辰) 몇 해런고 이백사십 아닐런가'라 한 것처럼 수운은 외세로부터 나라를,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하는 보국안민과 반봉건 반외세 제폭구민(除暴救民), 양반 상민'남녀 차별 없는 평등세상을 바랐다. 스스로 두 여종을 양녀와 며느리로 삼고 이를 실천했다.
단군의 홍익인간과 '세상에 나아가 이치로 다스린다'는 재세이화(在世理化)는 '시천주'(侍天主)와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인 동학과 통했다. 시천주 이념은 '사람이 바로 하늘이요, 하늘이 바로 사람이니, 사람 밖에 하늘이 없고 하늘 밖에 사람이 없다'(최시형)는 정신으로, 다시 '사람이 하늘'(손병희)이라는 인내천(人乃天)으로 이어졌고 하늘과 백성, 세상과 소통했던 것이다.
◆유불도를 통섭한 동학
경주 생가터에는 유허비가 있다. 수운은 '개벽의 영광을 억조창생의 머리 위에 빛나게 하기 위해' 동학을 창시했다.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부친으로부터 유학을 배웠고, 20년을 주유팔로하면서 사찰과 동굴에서 기도로 수련했고, 천주학도 접했고, 당시 풍미하던 미신과 풍수, 도참도 배웠다.
따라서 수운은 유교와 불교, 도교 그리고 서학(西學)까지 이해했다. 그러나 '유도(儒道) 불도(佛道)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라며 유불의 한계를 봤다. 천주교의 문제점도 알았다. 무속신앙의 잘못도 파악했다.
그는 이런 유불도의 사상, 종교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받아들이고자 했고, 그러면서 '나 또한 동쪽에서 태어나서 동쪽에서 깨달았으니, 도(道)는 비록 하늘의 도이지만 학문은 곧 동학이다'며 서학에 대비해 동학이라 이름했다.
시인 조지훈은 "유불도 삼교를 섭취하고 천주교 수입에 자극돼 한국사상으로 환원 집대성한 사상이 동학"이며, "동학의 원형은 단군신화에 있다. 수운의 시천주, 동학, 개벽사상은 신라적 성격"이라고도 했다.
◆고향의 핍박, 그리고 망각(忘却)
수운은 고향 경주는 물론 유교가 셌던 경북의 유림 핍박에 시달렸다. 부친은 수운이 '아버지가 학자로서의 명성이 경상도 일대에 자자해 최옥이라는 이름을 모른 선비는 없었다'고 할 정도였고, 퇴계학파 쪽이었다. 이름난 영남 남인(이상정'이상원)에게 10년간 수학했다. 경북 유림은 좌도난정 혐의를 받던 그 아들, 동학 창시자 수운을 그냥 두지 않았다.
상주 우산서원(외서면)이 도산남서원(도남동)에 동학 배척 통문(1863년 9월 13일)을 보내고 도산남서원이 다시 옥성서원(외남면)에 같은 통문(1863년 12월 1일)을 보냈다. "눈을 부릅뜨고 동학하는 무리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할 벼슬아치들은 왜 구경만 하고 있는가''' 동학을 들먹이는 저 무리들은 벼 이삭을 해치는 풀''' 햇빛을 보지 못하게 해 말라 죽게 만들고 덩굴을 뽑아 시들어 죽게 만들어야'''.'(우산서원)
집안, 고향 사람들의 냉대도 심했다. '듣지 못한 그 말이며 보지 못한 그 소리를/ 어찌 그리 자아내서 향안설화 분분한고/ '''/ 가련하다 경주향중 무인지경 분명하다/ '''/ 알도 못한 흉언괴설 남보다가 배나 하며/ 육친이 무삼일고 원수같이 대접하며/ 살부지수 있었던가 어찌 그리 원수런고.'(교훈가)
수운은 1907년 사면됐지만 고향의 냉대와 무관심은 그가 '후학들이 잊어버린 것을 스스로 탄식할 뿐'이라 했듯 망각에 가까웠다. 생가터는 잡초만 무성했다. 천도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 유허비 안내간판과 1971년 세운 비만이 생가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용담수도원 박남성 원장은 "최제우 대신사의 흔적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잘 보존, 관리해야 하나 재정여건과 관심 부족 등으로 어렵다"며 "전북에는 3곳에 동학혁명 기념관이 있다"고 전했다. 경주엔 수운의 지정문화재도 없다. 1997년 울산시가 수운이 '을묘천서'(乙卯天書'1855년)를 받았다는 '여시바윗골' 옛집 초당을 복원, 기념물(12호)로 지정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적멸굴 가는 길은 나뭇가지의 노란 리본만이 유일한 길잡이다.
◆경주의 동학 기리기와 박 전 대통령의 관심
경주에서 동학정신을 알리는 행사로 2002년 시작한 동학예술제가 있다. 탄신일(10월 28일) 또는 득도일(4월 5일)에 맞춰 열리며 올해 10회째를 맞았다. 예술제를 시작한 동국대 서양화과 김호연 교수는 "풀잎처럼 스러져간 민초들의 진혼과 더불어 오늘에 처한 역사의 반복적인 오류에 대한 반성과 아울러 새로운 정신적 봉기의 계기가 될 수 있는 공간 마련을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현재 경주에 동학미술관 건립도 추진 중이다.
천도교 측도 동학성지의 문화재 지정에 나설 참이다. 천도교 중앙총부 교화관 정정숙 관장은 "최제우 대신사뿐만 아니라 천도교 성지와 흔적들이 경주 등 여러 곳에 산재돼 있다. 이들 유적지의 문화재 지정 등을 내년부터 4년 예정으로 추진을 검토 중이며 동학 발상지 성역화 사업에도 노력할 것"이라 말했다.
경주엔 용담정 성지와 최제우 동상, 황성공원 부조물, 생가터와 가족묘 등 수운의 흔적들이 있고, 처형 장소인 대구 관덕당(중구 남사동)에는 천주교의 순교자기념관이 있다.
한편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1년 생가터의 최제우 유허비 건립 때 제자(題字)했다. 비문엔 '대한민국 문화공보부 천도교 후원 아래 문화재로서 세움'이라 적혀 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선친께서는''' 20대에 동학혁명에 가담하였다''' 처형 직전 사면됐다"고 했고, 농민군이 승리를 거둔 황토현에 기념비를 세우고 성역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인열 논설위원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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