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는 쇠붙이를 녹이는 그릇으로 단단한 흙이나 흑연 따위로 만든다. 한자로는 감과()라고 한다. '열광의 도가니'처럼 엄청난 뜨거움을 비유하지만, 어렸을 때 자주 듣던 '도가니 지옥'이 연상돼 끔찍함이 앞서는 낱말이기도 하다. 생전에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 죽으면, 죄의 종류와 질에 따라 10대 지옥에 떨어지는데 그 중 펄펄 끓는 쇳물에 담그는 열탕(熱湯) 지옥을 우리 말로 '도가니 지옥'이라 했다.
장애아 특수학교인 광주 인화학교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도가니'로 우리 사회가 도가니 속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이 사건이 처음 알려진 2005년, 그리고 공지영이 소설로 쓴 2009년에는 그냥 넘어갔으나, 영화로 개봉하면서 큰 반향을 부른 것이다.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영화를 본 사람이면 대개 분노와 한숨, 그리고 눈시울이 축축해지는 경험을 한다. 언론 보도나 소설의 글이 따를 수 없는 영상의 힘이다.
후폭풍도 거세다. 영화에서 한통속으로 나오는 학교 관계자와 경찰, 검찰, 변호사, 판사의 신상이 낱낱이 드러났다. 이들은 당시 사건을 직접 해명해야 했다. 학교는 폐쇄로 가닥이 잡혔으며, 정부는 장애인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는 친고죄를 없애는 쪽으로 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지만 흐지부지됐거나, 가해자가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여러 사건에 대한 재수사 요구도 나온다.
그러나 현실은 가슴 가득한 답답함을 속 시원히 풀어주지 못한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처벌할 수 없는 공소시효, 같은 죄로 두 번 처벌할 수 없는 일사부재리 원칙과 같은 법률 용어가 가로막기 때문이다.
영화 '도가니'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보호를 받고, 이 사회가 약자에게 최소한의 살 권리도 보장하지 못하는 한, 소설과 영화 '도가니'는 영원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메시지에 많은 국민이 공감했다. 그 결과, 제도와 법 개선 작업이 뒤따르고 있다. 그러나 개인의 기본 인권을 말살하는 잔인한 폭력 행위는 지금도 곳곳에서 은밀하게 벌어진다. 이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감시하고, 철저하게 막지 못하면 또 다른 '도가니' 영화를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지화 논설위원 akfmcp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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