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류천(曲流川)으로 불리는 S협곡의 지리학적 이름은 사행천(蛇行川'meander). 계곡 사이를 흐르는 강물의 차별침식에 의해 만들어진 지형이다. 사행천이 평지에 생성되면 하회마을이나 예천 회룡포처럼 특색 있는 수변(水邊)마을이 생겨나고 산지(山地)에 들어서면 영월 태화산이나 홍천 금확산처럼 멋진 태극지형이 만들어진다.
태극지형의 백미는 단연 동강(東江)이다. 영월 백운산 자락에 형성된 S협곡은 한반도 모형으로 유명하고 그 조형미나 구도에서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한다. 미녀의 허리선(線)인가, 아라리 곡조의 음률인가. 백운산에 펼쳐진 S라인을 찾아 영월로 떠나보자.
◆산악지형과 동강의 습기가 빚어낸 비경=전국에 백운산 지명은 몇 개쯤 될까. '한국의 산하' 100대 명산에도 3곳이 포함되어 있고 지역의 작은 산들까지 포함하면 30곳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흰백(白)에 구름운(雲)을 쓰니 구름이 많은 지역적 특성에 기반하고 있다 하겠다. 광양의 백운산이 섬진강의 습도와 호남정맥의 산물이듯 영월 백운산도 강원 중부의 산악지형과 동강의 습기가 빚은 합작품이다.
동강의 길이는 65㎞. 오대산에서 발원하는 오대천과 정선 북부를 지나가는 조양강(朝陽江)이 합류해 만들어진 강이다. 완택산과 곰봉 사이 산악지대를 굽이쳐 남서쪽으로 흐르던 동강은 영월 하손리에서 다시 서강(西江)과 만나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옛날 동강은 고립무원 오지의 강이었다. 정선사람들조차 깊은 골짜기의 산이라 하여 이 일대를 '안골'이라 불렀다.
물길이 서울과 닿는다는 이유로 뗏목을 나르던 수송로로만 요긴하게 쓰였을 뿐이다. 뗏목사업은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잠시 번창하다가 1957년 영월~함백 구간 태백선이 놓이면서 기차에 그 기능을 넘겨주고 말았다.
지리(地理)에서도 부침은 있는 법, 그동안 약점이었던 고립, 낙후, 저개발의 핸디캡은 이제 레저, 친환경시대를 맞아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발길이 닿지 않은 산림, 오염 제로의 청정계곡은 '한국의 아마존'으로 불리며 탐방객들로 북적인다.
영월은 이제 사계절 드나드는 인파로 '영월'(寧月)이 없다. 봄엔 산나물투어에 나선 주부들이, 여름엔 래프팅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가을엔 단풍객들을 실은 버스가 바삐 드나든다.
TV에서 연일 단풍 소식으로 소란스러울 즈음 일행은 영월 백운산으로 향했다. 들녘엔 채소들이 마지막 결실을 채우고 들을 비껴선 옆 둑엔 동강이 가을 햇살을 간질이며 한가롭게 흐른다.
산행머리 점재마을은 나루터(점재나루)가 있던 곳. 10년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줄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지금은 번듯한 잠수교에서 낚시꾼들이 한가로이 찌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는다.
◆절벽 밑으로 펼쳐진 동강 풍경에 탄성=옥수수, 콩밭이 펼쳐진 들판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면 산은 바로 급경사 길을 열어 놓는다. 활엽수림과 들꽃들이 도열해 있는 등산로를 30분쯤 오르면 병매기고개. 고개는 다시 벼랑 쪽으로 소로를 펼치고 5분쯤 진행하면 멋진 전망대 하나를 세워 놓는다.
수천 길 절벽 위에 선다. 층층을 가늠할 수 없는 절벽의 파노라마, 그 모퉁이를 굽이치는 옥색 물빛은 말 그대로 선계(仙界)를 그려내고, 서쪽에선 중바닥 여울의 옥색 물줄기가 시야를 간질인다.
산길은 다시 가파르게 솟구친다. 대부분 40, 50도 급경사. 최근 계단, 로프, 가드레일을 설치해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
635고지를 지나 드디어 정상. 돌탑으로 쌓은 아담한 정상석이 일행을 맞는다. 잡목으로 우거진 정상은 사면이 막혀 있다. 조망을 찾아 다시 전망대 쪽으로 진행한다. 문희마을 갈림길을 지나자 다시 전망대가 나타난다.
먼저 제장마을을 돌아 백룡동굴 쪽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뚜렷하다. 나리소의 물색은 어느새 옥빛으로 짙어졌고 그릇모양을 하고 있다는 바리소도 뚜렷이 형체를 드러낸다. S자 협곡은 이곳에서 더 긴박하게 출렁인다. 벼랑 사이를 굽이치는 강물의 흐름, 그 옆에선 하얀 백사장이 강의 빠른 호흡을 조율해 준다.
일행은 칠족령으로 향한다. 이제 산은 하산길을 열어 놓는다. 내리막길이라고 맘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이제 산길은 롤러코스터를 탄다. 그 장단에 종아리 근육만 혹사당한다.
◆'치명적인 아름다움' 간직한 칠족령=백룡동굴 입구 조금 못 미쳐 돌탑비와 만난다. 실족사한 등산객을 애도하는 비다. 추모비가 벼랑 끝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 풍경에 더 가까이 가려다가 화를 부른 듯하다.
백운산에서는 벼랑 끝에서 한발만 더 내밀어도 시야가 트인다. 잡목의 방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객들은 한발 사이로 죽음과 경계를 걸으며 모험을 즐기는 것이다.
나륜재를 지나 드디어 일행은 칠족령에 이른다. 이 재는 정선군 신동과 영월 제장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옛날 아래 마을에서 개 한 마리가 옻솥을 뒤엎고 고개나루로 도망치며 발자국을 남겼다고 해서 칠족령(漆足嶺)이 되었다고 한다.
동강 조망은 칠족령이 단연 으뜸이다. 동강 12경 중 하나인 바리소가 바로 밑에서 펼쳐지고 소골마을의 전원 풍경이 시선을 잡아끈다. 협곡을 돌아 나온 여울은 뼝대(절벽)에 부딪쳐 하얀 포말로 부서진다.
칠족령의 '치명적인 비경'을 가슴에 담고 이제 종착점인 제장마을로 향한다. 산은 벌써 고도를 뚝 떨어트렸다. 고도를 낮출수록 산과 멀어지고 그 아쉬움은 강이 희석시켜 준다.
어라연, 황새여울, 진탄나루를 돌아온 이 강물엔 떼꾼 지아비를 여읜 아낙의 애환이, 산골 노동에 지친 초동(樵童)의 고초가 배어 있다.
드디어 동강에 발을 담근다. 물결의 반사면을 따라 아라리 곡조가 오버랩된다. 산간지역의 정한을 가장 잘 담아냈다는 정선아라리. 그 맑은 선율이 가을강의 여운을 따라 길게 미끄러져 간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