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한글

1443년 창제돼 1446년 반포된 한글. 조선의 공식 나라글이 되는 데 긴 세월이 걸렸다. 1894년 고종이 '법률과 칙령은 국문을 기본으로 하되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혼용한다'는 칙령을 반포할 때까지. 푸대접 속 한글은 그러나 수많은 편지글, 언간(諺簡)으로 살아남아 옛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나는 아무런 일이 없는 듯이 있나이다. 형제분이''' 날씨가 하도 험하니''' 이 무더운 날씨에 조심들 하소서''' 우리 집도 모두 무사히''''란 언간이 그 하나. 송강 정철의 어머니가 남편 사후 송강 형제들이 경기도 고양의 아버지 산소에서 여막살이를 할 때인 1571년 6월 28일 보낸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한글 언간 중 가장 오래됐다. 무더위에 고생하는 아들들을 걱정하는 어머니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또 있다. '당신 늘 나에게 말하기를 둘이 머리가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시더니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두고 먼저 가셨나요''' 이 언간을 자세히 보시고 제 꿈에 와서 보이고 자세히 말해 주세요''''란 '원이 엄마' 편지. 1998년 안동에서 택지 조성 작업 중 남자(이응태) 시신과 함께 발견된 후 국내외에 널리 소개돼 심금을 울렸다. 일찍 남편을 여읜 부인(원이 엄마)이 1586년 6월 1일 쓴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색다른 언간도 있다. '요사이 추위에 모두들 어찌 계시는지 심히 걱정이 되오. 나는''' 몸은 무사히 있지만 봄이 내달으면 도적들이 다시 날뛸 것이니 어찌해야 할지''' 살아서 서로 다시 보면 기약을 할까마는 언제라고 기한을 정하지 못하겠소. 그리워하지 말고 편안히 계시오''''란 편지다.

임진왜란 중인 1592년 12월 24일 학봉 김성일이 경상우도감사로 경상도 산음현에 있을 때 안동 본가의 부인(안동 권씨)에게 '조기 두 마리, 석이버섯 두 근, 석류 스무 개'와 함께 보낸 글이다. 그가 죽기 4개월 전 전쟁터에서 보고 싶은 부인을 못 보고 띄운 언간이 마지막 이별의 편지가 된 셈.

이러한 옛 이야기를 전해온 한글이 2009년 인도네시아 원주민 찌아찌아족에게 수출됐다. 또 남미 볼리비아 원주민 아이마라 부족을 위해 서울대가 올 들어 현지 대학과 한글 보급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처럼 문자 없는 원주민 후손들이 뒷날 자신들 옛 조상 이야기를 한글 기록으로 접한다고 생각하니 600년 만의 한글 부활을 보는 듯하다.

정인열 논설위원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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