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시안미술관을 찾는 차량들 외에는 낯선 사람들의 인적조차 드문 외딴 시골. 이곳에 젊은이들이 발길이 부쩍 늘었다. 마을 곳곳에는 이름이 적힌 깃발이 하나씩 꽂혀 있는 모습도 영 수상하다. 빈집에도, 다리에도, 시골집 벽에도 수십 군데에 깃발이 하나씩 꽂혀 있다. 모두 미술 '작품'으로 변신할 곳이란다.
요즘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와 화산1'2리, 화남면 귀호리 일대에 조용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변화'라고는 하지만 기존에 있던 것을 깨부수고 요란한 뭔가를 만드는 그런 작업이 아니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다 노인 인구가 많은 시골인 만큼 그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잘 살려 톡톡 튀는 매력보다는 한편의 산수화와 같은 편안한 풍경의 작품을 만들겠다는 것이 이곳을 찾아온 젊은 작가들의 생각이다. 과연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의아해하기만 했던 마을 노인들은 일단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는 즐거움에 마음이 조금 풀어졌고, 점점 예뻐지는 마을 모습에 또 한 번 스르르 마음이 풀어지는 중이다. 그렇게 마을은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예술로 재탄생하는 시골마을
지난 7월 문화체육관광부는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와 화산1'2리, 화남면 귀호리 일대의 시골마을을 '마을미술 행복프로젝트' 사업지로 선정했다. 면적은 꽤나 넓다. 기존에 마을미술 프로젝트가 진행됐던 곳들이 작은 동네, 혹은 건물 하나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번 가상리 일대에서 이뤄질 프로젝트는 3, 4배 규모에 달한다. 마을을 채울 콘텐츠 역시 색다르다. 3개 마을에 걸친 5개 길을 테마로 해서 작품들이 곳곳에 들어선다. 미술작품 중심으로 진행됐던 기존의 틀을 벗어나 건축가들까지 합세하면서 한결 새롭고 내실 있는 변화를 추구할 수 있게 됐다.
가상'화산'귀호리 일대는 안동 권씨, 창녕 조씨, 영천 이씨의 문중 정자, 재실, 서원, 종택 등이 25곳에 이르는데다 수달이 사는 실개천도 잘 보전돼 있는 등 뛰어난 자연환경을 갖춘 곳이어서 충분히 경쟁력 있는 관광 명소로 거듭날 수 있다는 평가다.
맨 처음 '마을을 한번 변화시켜보자'고 생각한 사람들은 마을의 젊은(?) 주민들이었다. 가상리에서 현재 가장 젊은층에 속하는 권효락(57) 씨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마을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미술을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옛 화산초교 가상분교가 미술관으로 새단장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광경을 보고는 '예술'이 마을을 살리는 방안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 마을의 새마을지도자이기도 한 권 씨는 "평생을 이곳에서 자라고 생활해왔는데, 농촌 공동화 현상이 너무 심해지다 보니 이제 앞으로 15년 후에는 나 혼자만 마을을 지킬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었다"며 "500년 선조가 살아온 마을을 폐허로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에 마을 어르신들을 설득했다"고 설명했다.
◆신 몽유도원도를 만들겠다
가상리 일대 행복프로젝트의 콘셉트는 '신 몽유도원도'다. 이번 프로젝트의 총감독을 맡고 있는 박수진 씨(큐레이터)는 "지난 5월 처음 마을을 둘러봤는데 복숭아나무의 잎이 파릇파릇 올라올 무렵이었다"며 "고즈넉한 분위기의 시골 모습이 마치 무릉도원에 온 것과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런 느낌을 최대한 살리려고 기획했다"고 했다.
프로젝트의 큰 틀을 구성하는 것은 5개의 길이다. '걷는길'은 가호리 마을 안 길을 한 바퀴 도는 코스로 산책하면서 작품을 즐기기에 알맞다. 또 '바람길'은 마을 앞으로 난 신작로를 따라 귀호리와 화산리 일대를 크게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코스로 마을에서 빌려주는 아트자전거나 아트자동차를 빌려타고 투어를 즐길 수 있다. '스무골길'은 비보풍수와 예술이 만나는 지점이다. 가상교 아래 수달과 반딧불이가 사는 실개천을 지나 혈등과 스무골 유적지를 돌아보는 왕복 1시간 남짓의 코스다. 혈등은 1592년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충의공 권응수 장군의 관상을 보고 후손들이 발복하지 못하도록 용비등천혈 중 용의 꼬리를 끊었던 자리이며, 비보풍수는 풍수적으로 부족한 것을 보완해주기 위해 행해지는 다양한 것들로 땅의 기운을 강화하기 위해 마을에 조성된 비보림이 대표적이다. '귀호마을길'은 효마을 표지석에서 출발해 화계정을 지나 저수지를 돌아오는 길로 한적한 시골마을의 정취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짧은 코스이며, '도화원길'은 넓은 복숭아밭이 펼쳐진 모산골짜기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볼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이 다섯 개의 길은 각각 역량 있는 아티스트들의 작품들로 가득 채워진다. 이달 말까지 들어설 작품은 모두 45점. 이 중 공모를 통해 작품을 선정한 것이 25점이고, 감독이 지명한 작가의 작품이 20점이다. 박 감독은 "가급적 마을의 원형을 그대로 살려는 데 초점을 뒀으며, 예술과 관광을 연계해 단순히 보고 즐기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곳에 머물며 주민들의 새로운 수익 창출과도 연계할 수 있는 방안을 심도있게 고민했다"고 밝혔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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