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창석의 뉴스 갈라보기] 기부문화와 국채보상운동

지난 10월 5일에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개관되었다. 대구 도심에 있는 4만여㎡의 거대 녹지인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안에 터를 잡은 기념관은 100평 남짓한 대지에 지상 2층 건물로 지어져 초라해 보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 겸허함의 정신이 관람객들을 압도하는 것 같다.

아시다시피 국채보상운동은 구한말인 1907년에 대구에서 일어나 전 국토로 번져나간 국권 수호 운동이다. 이 운동이 특이한 것은 국민들이 호주머니를 털어서 나랏빚을 갚아 국가를 지키겠다는 것에 있다. 당시 수많은 지사가 육신을 던져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가운데서 유독 경제적인 관점으로 맞섰다. 건강에 나쁜 담배를 끊고 절주(節酒)를 하며, '여자들의 손가락을 속박하는 반지를 뽑아'('국채보상탈환회'의 호소문) 국가를 보존하려는 평화 운동이었다.

과거 역사는 현재에 의해 재해석되고 의미가 부여되는바, 오늘날에 이르러 104년 전에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은 '소액 기부 운동'의 감동적인 전례로 기록될 만하다. 나눔과 기부가 시민사회의 중요한 어젠다로 자리 잡게 된 현재도 그렇거니와 계층 간의 경제적 갈등이 더욱 심화될 미래에 있어서도 국채보상운동은 의미가 상당하다 하겠다.

잠시 밖으로 눈을 돌려보자. 영국의 '자선'구호재단'(CAF)과 캘럽의 조사에 따르면 '2010년 세계 기부지수'에서 한국은 81위가 나왔다고 한다. 조사 항목은 지난 한 달간 돈을 기부한 적이 있는지, 봉사활동을 했는지, 낯선 이를 도운 적이 있는지를 물었다는 것이다. 이즘 들어 우리 주변에는 자원봉사자들이 많고 기부금에 대한 소문도 많지만, 아직 선진국 등 다른 나라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지표가 일깨워주고 있다.

104년 전 국채보상운동에서 양반, 농민, 기생, 심지어 도둑까지 삽시간에 소액 기부 행렬에 참여한 예에서 보듯이 기부 행위는 동기와 과정, 그리고 파급력과 효용 등의 면에서 무수한 효과를 거느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기부자 자신을 즐겁게 해준다. 그러므로 기부 행위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긍정적인 '문화'로 자리 잡을 만하다. 전화 ARS로 하는 익명의 소액 기부에서부터 기업의 거액 기부, 자원봉사자의 노력 기부, 전문가의 재능 기부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틈서리에 피는 아름다운 꽃과 같은 것일 테다.

'행복한 기부'(토마스 람케)라는 책을 보면, 독일의 한 사회복지사에 의해 시작된 '베를린의 식탁'이란 자선단체가 소개되고 있다. 처음에 이 복지사는 빵집, 슈퍼마켓, 채소 가게로 차를 몰고 다니며 유효 기간 종료 직전의 음식물을 구해서 사회복지시설에 전달했다고 한다. 곧 그녀는 '베를린의 식탁'을 결성했고, 13년 후에는 매일 1만 5천 명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다른 '식탁'들도 잇따라 생겨나 그 후 약 50만 명의 독일인들이 연방 곳곳에서 7만t에 달하는 식료품을 전달받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봉사자가 참여했는데, 현업에서 퇴역한 연금 수령자, 왕년의 알코올중독자, 실업자들이 할 일을 찾았을뿐더러, 그래픽 전문가들이 플래카드나 웹사이트를 만들어 주고 후원 기업들도 꼬리를 무는 등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자발성을 낳았다. 거기다 베를린에서만 6만 명이 일자리를 얻는 고용 창출 효과까지 발생했다. 국가적으로도 상당한 위안이었다. 공익사업이 국가 예산에만 의존한다면 국가에 재정위기가 닥치면 복지는 아랑곳없어진다.

기부금을 재원으로 하는 시민재단의 활동은 무자비한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반작용이며 자율성의 가장 긍정적이고 신뢰할 만한 동인이다. 현실정치 세력들이 이를 악용할 수 없게끔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도 운동의 지속을 위해선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국채보상운동은 실로 근대시민사회가 눈뜨기 전에 벼락같이 출현한 기부 운동의 모범이다. 절약해서 한두 푼을 모아 기부하는 보람으로 인해, 양반 상민 천민의 계층 벽과 경상 전라 평안 함경의 지역 벽이 삽시간에 무너져 버린 감동적인 사건이다. 그 바탕에 국권을 되찾겠다는 지사적인 갈망이 있었거니와, 이제 이 운동은 상호 의지하고 상생하려는 현대시민사회의 활기에 밑거름으로 작용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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