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담판의 기술

서기 993년. 신흥 강국 거란(요)의 장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하였다. 고려의 국경을 유린한 소손녕은 항복하지 않으면 고려군을 몰살시키겠다며 위협하는 등 기세등등했다. 이에 고려의 장수 서희는 일전을 각오하고 담판을 짓기 위해 적진을 찾아갔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절을 해 예의를 갖추라고 요구하자 서희는 대신 간에는 절을 하는 예의가 없다며 맞섰다.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은 서희는 "고구려의 옛 땅은 거란의 것"이라는 소손녕의 말에 "고려야말로 국호에서 알 수 있듯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며 조목조목 반박, 역사적 연고권 논쟁에서 상대를 제압했다.

서희는 한발 더 나아가 거란과 통교하기 위해서는 서경 이북을 가로막고 있는 여진을 물리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결국 거란은 서희의 주장을 받아들여 고려와의 국교 수립에 만족하며 물러났고 서희는 다음 해에 여진을 축출, 강동 6주까지 회복했다. 담판 과정에서 거란이 송나라와의 싸움 때문에 고려와 화친을 맺고 싶어한다는 속셈을 간파하고 담대한 주장을 펼친 서희의 외교적 승리였다. 서희의 활약 덕분에 고려는 영토를 잃을 수 있는 위기를 극복하고 국경을 북으로 더 확장하는 성과까지 얻게 됐다.

팀 쿡 애플 최고 경영자가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을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의 추도식에 초청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삼성전자와 애플은 '특허 소송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태여서 초청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현재 애플이 소송에서 유리한 국면을 차지하고 있으나 장기전으로 갈 경우 이득이 될 것이 없다는 판단 하에 삼성전자와의 화해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란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경쟁자이자 서로 가장 큰 거래처로 협력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삼성전자와 애플의 관계가 이재용 사장과 팀 쿡 CEO 간의 담판에서 재설정될 것으로 보인다.

'담판'은 서로 맞서는 관계에 있는 양측이 대면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상대방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빠른 상황 판단과 배포 있는 자세로 이익을 극대화하는 담판의 기술이 요구된다. 서희가 우리 역사상 가장 유능한 외교관으로 평가받는 것은 이러한 담판의 기술을 훌륭하게 구사했기 때문이다. 이재용 사장이 팀 쿡과의 담판에서 어떤 성과를 이끌어낼지 능력을 검증받는 시험대 위에 서게 됐다.

김지석 논설위원 jiseo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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