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체벌 시대의 마감

오랜만에 고등학교 교사인 고교 동창을 만났다. 교직을 천직으로 여기는 친구였다. 최근 서울에서 한 중학교 교사가 쇠 파이프와 효자손 등으로 학생을 체벌해 정직 3개월의 중징계를 받은 뉴스가 생각나 뜬금없이 '요즘 학교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학생을 지도할 방법이 없어 너무 힘들다'고 했다.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는 아이를 깨우면 그냥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잔다는 것이다. 야단을 치고, 벌점을 줘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기 때문에 수업 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애꿎은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했다. 어차피 대안이 없는 문제여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비틀스의 'Let it be'라는 노래 가사에 '성모 마리아의 지혜로운 말씀이 내버려 두라'고 했으니 너도 내버려 두라고 했다.

기자는 체벌 금지의 부작용에 대한 여론이 들끓던 지난해 12월, '체벌은 폭력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어떤 명분으로든 체벌은 안 되며, 체벌 금지는 더 이상 논의 대상이 아니고 이제는 대안 찾기에 힘쓸 때라는 것이 요지였다. 몇몇 교사로부터 학교 현장과 동떨어진 이상일 뿐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친구의 말에 비춰 보면 10개월이 지난 지금도 대안은 아직 없고, 혼란은 여전해 보인다. 심지어 '체벌이 없으니 무섭지 않아 선생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거나 '체벌이 필요하다'는 학생도 많다.

교실의 혼란은 아직 진행형이지만 얻은 것도 있다. 체벌 금지의 부작용이 점차 숙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매일같이 신문과 TV의 머리기사를 장식했던 학생들의 노골적인 대들기나 도를 넘은 일탈 행위에 대한 기사는 거의 사라졌다. 심심찮게 올라오던 동영상도 볼 수 없다. 최소한 겉으로 드러난 부작용은 걱정했던 것만큼 심각하지 않아 보인다. 아직 은밀한 체벌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교실의 혼란도 크게 줄 것이라는 믿음도 생긴다.

체벌은 숨어 있는 폭력성에 비춰 대개 남성적이다. 그리고 남성 대부분은 체벌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다. 이 추억은 대개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데 쓰인다. 학생 때의 체벌이나 군대에서의 얼차려가 당시는 고통스러웠지만 지나고 보니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됐다느니, 남자답게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느니 하는 식이다. 학창 시절 많이 때린 선생님이 더욱 기억나고 보고 싶다거나 그때 선생님이 '사랑의 매'로 지도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쁜 길로 빠졌을 것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통의 기억이 빛바래, 다소간의 과장과 미화가 있다 하더라도 크게 잘못된 말은 아닐 것이다.

체벌 금지를 반대하는 측의 주장은 명확하다. 원칙은 동의하지만 다수의 일반 학생 보호가 먼저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통제 수단이 필요하며 체벌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체벌 금지를 옹호하는 측의 주장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대안이 마땅치 않아서다. 최소한의 얼차려를 허용하는 등의 학생 지도 지침이 있지만, 직면한 교실의 혼란을 통제하는 데는 효율성이 크게 떨어진다.

그러나 체벌의 결과가 일부 학생에게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는 점에서 체벌 금지는 단순한 원칙을 넘는 당위성이 있다. 부모, 교사, 군대 상급자와 같은 항거할 수 없는 힘에 당하는 치욕과 좌절은 삶까지 파괴하지는 않더라도 오랫동안 악몽처럼 따라다닌다. 인간의 주체성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던 미셸 푸코는 신체에 대한 처벌은 인간성을 말살하고,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넣는다고 했다. 가해자는 다른 사람을 치욕스럽게 만들면서 자신은 신체적 처벌이 주는 잔인한 즐거움까지 누린다고 했다. 이를 원용해 사랑의 매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 누구나 공분할 만한 수준의 체벌이 잦게 일어나는 것을 보면 푸코의 지적이 그리 동떨어진 것만은 아니다.

체벌 금지에 대한 찬반 논란은 수면 아래에 있지만 아직은 과도기이다. 주류와 비주류가 역전하는 시기는 늘 혼란하다. 이때 교실, 혹은 학교라는 좁은 공간에서 맞닥뜨린 교사와 학생은 모두 피해자이다. 피해자끼리 대결 구도를 만들 필요는 없다. 혼란이 길면 길수록 손쉬운 대체 수단인 체벌의 시대로 역행하려는 반동이 다시 고개를 들기 마련이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몫이다.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하고, 아파해야 '비인간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선생님과 아이들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鄭知和/논설위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