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낙동강시대] 지류를 찾아서…⑮감천(甘川)<하>

천년고찰 품은 아름다운 강, 빼너난 경치 보며 시 한 수 읊어보세∼

천년고찰 직지사 대웅전 앞에는 보물 제606호인 삼층석탑이 영겁의 세월을 이겨내고 있다.
천년고찰 직지사 대웅전 앞에는 보물 제606호인 삼층석탑이 영겁의 세월을 이겨내고 있다.
국보 제208호인 도리사 청동육각사리함.
국보 제208호인 도리사 청동육각사리함.
단아한 방초정 모습
단아한 방초정 모습
몽향 최석채 선생 기념비가 직지문화공원에 세워져 있다. 뒤편에는 백수문학관이 자리한다. 박용우기자
몽향 최석채 선생 기념비가 직지문화공원에 세워져 있다. 뒤편에는 백수문학관이 자리한다. 박용우기자

천고마비(天高馬肥). 상강(霜降)을 지나자 황금색이던 가을 들판은 추수를 마치고 이젠 겨울맞이를 준비하고 있다. 여름내 한껏 기승을 부리던 강물도 어느새 조용해졌다, 맑디 맑은 강물은 이젠 시원하기보다 오히려 시리듯 차가운 느낌이 전해온다. 푸르름을 자랑하던 감천(甘川)의 나무'풀 등도 울긋불긋 단풍 옷을 갈아 입은지 오래다. 김천(金泉)을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이라 부른다. 이수(二水)는 감천'직지천으로 결국 하나요, 김천 그 자체다. 감천(甘川)은 김천의 역사요 김천인의 삶이다. 감천을 둘러싼 옛 사람들의 흔적을 더듬어본다.

◆불교의 요람인 김천 직지사와 선산 도리사

감천은 신라 천년 불교의 발생지다. 감천 지류인 직지천에는 천년사찰 '황악산 직지사'가 있다. 고구려 승(僧)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하나 절 이름은 선종의 가르침인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旨人心 見性成佛)'에서 땄다는 것이 정설이다. 직지사는 신라 때 크게 두번의 불사가 있었다. 특히 두번째 중건 때인 930년에는 천묵대사가 '금자대장경'을 서사(書寫)하고 경순왕이 경명제자(經名題字)를 썼는데, 이는 고려대장경보다 590년 앞서 직지사에서 금글씨로 대장경을 펴냈다는 것이다. 직지사는 또 사명대사의 출가사찰로 유명하다. 사명은 임진왜란 때 의승병을 이끌고 왜병을 물리치고 왜국까지 건너가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명당 활약 때문인지 왜군은 절에 불을 질러 번창했던 직지사 전각 대부분이 큰 피해를 입는 곡절을 겪게 된다. 특히 일제는 국권을 찬탈한 뒤 사찰령을 제정(1911년), 직지사는 해인사의 말사로 전락했다. 사세(寺勢)도 열악해져 당우와 암자가 많이 훼손됐다. 직지사는1954년 제 8교구 본사로 승격하고 대가람으로 모습을 갖추었다. 도리사 금동육각 사리함(국보 제208호),대웅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606호), 대웅전 삼존 후불탱화 (보물 679호) 등 직지사에는 수많은 문화재가 전한다.

감천 하류지역 선산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신라 불교를 포교를 위해 구미 해평면 태조산에 처음으로 지은 사찰(눌지왕 1년,417년)이다. 도리사에는 1976년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올 때 모셔온 세존 진신사리가 세존사리탑 보수 공사 중 금동육각사리함에 봉안되어 발견됐다. 금동육각사리함은 8세기 중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위탁 소장돼 있다. 1968년에는 아미타 좌상 도금시 불상 밑에서 1731년(영조 7년)때 중수기가 발견됐다. 극락전 뜰 앞에 있는 보물 470호인 도리사 화엄석탑은 일반적인 석탑과 비교해 특이한 양식이다. 그 형태는 여러 개의 석주를 맞대어 기단부를 형성하였고 다시 그 상층부에 중층의 탑신부와 상륜을 배치한 특수형식으로 귀중한 문화재로서 옛 향기를 품고 있다. 아도화상이 도를 닦았다는 좌선대 옆에는 아도의 사적비겸 자운비가 있다. 앞면에는 인조 17년에, 뒷면에는 효종 6년에 새긴 아도의 사적이 음각돼 있다. 법당인 극락전과 삼성각을 비롯해 선원과 2동의 요사채, 그리고 세존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다.

◆선비들의 묵향이 가득한 누(樓)와 정(亭).

아름다운 강과 산에서 옛 선비'묵객들은 시문과 수묵화를 즐겼다. 경치가 빼어난 강의 주변 어디에나 선비문화의 상징처럼 루정들이 산재해 있다. 선비들은 정자에서 시를 노래하고 사군자를 치는 등 풍류를 즐겼다. 감천에도 산세가 깊고 물빛이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가 자리한다.

감천유역에서 옛 풍치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정자는 방초정(芳草亭)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 형태의 정자다. 방초정은 연안(延安) 이씨 집성촌인 구성면 상원리 마을 앞에 있다. 원래 조선 인조 3년에 방초(芳草) 이정복이 건립한 것을 후손이 수해로부터 안전한 연못 안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임진왜란 때 이정복의 처 화순 최씨 부인(17)이 신행을 오다 왜병을 만나 정절을 지키기 위해 마을 앞 웅덩이에 뛰어들어 자살했다.이 때 하녀 석이(石伊)도 함께 투신해 숨졌다. 이에 이정복이 어린 부인을 그리워하며 웅덩이를 확장해 '최씨의 연못'이라는 뜻의 '최씨담(崔氏潭)'이라고 하고 방초정을 지어 부부의 인연이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기원했다는 애뜻한 사연이 전한다. 지금도 정자 한 쪽에 인조가 내린 어필정려문과 정려각 앞에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찾는 이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방초정은 수세기동안 당대의 유명한 시인묵객들이 감천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했는데 방초정 10경이 유명하다. 그 중 가을 단풍의 아름다음을 그려 낸 싯귀가 눈을 끈다.

잎새마다 대(臺) 앞에 붉게 떨어지는 단풍잎 (葉葉臺前丹落楓)

가을 모습 그림 속이로다. (秋容恍惚畵圖中)

문 밖에 어떤 수레 멈춘 길손이 (有何門外停車客)

앉아서 二月의 봄꽃보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느뇨 (坐愛春花二月紅)

-방초정 10경(十景) 중 일곱번째 에서-

방초정에서 멀지 않은 구성면 광명리에는 무송정(撫松亭)이 있다. 동주 최씨 하촌마을 송설봉 아래에 자리한다. 1729년(영조 5년) 조마면 신곡리 중리마을에 지어졌다 1740년 이곳으로 옮겼으며 최근 보수공사를 마쳤다. 무송정은 병마절제사를 지낸 최세필이 부친의 시묘살이를 하던 여막 터에 정자를 짓고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정면 4칸,측면 3칸 규모로 2층 다락 형태를 하고 2층 3면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특히 김산지(金山誌) 등에는 김천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이 무송정에 모여 여러차례 회합을 가졌다는 기록이 전한다. 무송정은 동주 최씨 후손들이 선조인 최영 장군의 영정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3일에 제향하고 있다. 이 정자는 병자년(1936) 수해 때 감천의 범람으로 일부 훼손됐으나 보존상태가 양호해 조선후기 정자 연구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감천이 품은 인물들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선생를 떠올린다. 봉계리에서 태어난 그는 종숙부인 영의정 석문(錫文)과 매형인 점필재 김종직에게 수학했다.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1481년(성종 12년) 28세에 왕의 명을 받아 승(僧) 의침과 함께 당나라 두보의 시를 언해했다, 이것이 두시언해(杜詩諺解)의 초간본으로 우리나라 고문과 고어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1493년(성종 24년) 김종직의 문집 편찬과 관련한 무오사화때 연좌돼 의주와 순천으로 유배됐다.이 곳에서 우리나라 유배가사의 효시인 '만분가(萬憤歌)를 집필했다. 선생은 사후인 1506년(중종22년)에 사면돼 이조참판으로 증직됐다 숙종 34년에 이조판서로 다시 높여져 '문장공(文莊公)' 시호가 내려졌다. 매계는 조선초 성리학의 대가로 점필재와 함께 추앙을 받았으며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김천문화원에서 1980년부터 선생이 탄생한 고택 터인 율수재에서 '매계 백일장'을 열고 있다.

언론인 몽향(夢鄕) 최석채(崔錫采1917-1991) 선생도 감천이 낳은 인물이다조마면 신안리 출신인 그는 매일신문 편집국장과 주필을 거쳐 조선일보 편집국장'주필, 문화방송, 경향신문 회장 등을 거쳤다. 자유당 독재정권에 항거하고 민주화 및 언론자유 수호에 앞장섰다. 특히 매일신문 주필 시절인 1955년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로 필화(筆禍)가 되어 신문사는 백주에 테러를 당하고 자신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2000년 국제언론인협회(IPI) '세계언론자유영웅 50인'에 선정됐으며, 이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지금 김천 직지문화공원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 감천 으뜸 먹거리인 지례 흑돼지고기와 황악산 산채정식

여행에서 갖는 즐거움 중 하나는 향토색이 짙은 먹거리를 맛보는 것이다. 감천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지례흑돼지고기다. 감천변 상류의 지례는 조선시대부터 '지례돈(知禮豚)'이라는 토종 흑돼지 산지로 명성을 날렸다. 궁중에도 진상되었다고 전하며 조선총독부가 발간하는 잡지에도 등장한다. 현재 지례 흑돼지는 7개 농가에서 1천960여두를 사육하고 있다. 숯불에 구운 고기가 담백'고소하고 쫄깃쫄깃하다. 다른 돼지고기와 달리 껍데기와 비계를 그대로 구워도 기름이 흘러내리지 않으며 살코기 보다 비계가 더 쫄깃하다. 지례면소재지 식당에서 지례 흑돼지를 맛 볼 수 있다.

천년고찰 직지사 아래 직지천 일대 식당가에는 황악산에서 채취한 갖은 산나물로 차려진 산채정식이 미식가의 입맛을 유혹한다. 더덕구이, 버섯회, 도토리묵 등 30여 가지가 넘는 산채정식은 김천의 민속주 과하주와 함께 가장 풍성한 먹거리로 손꼽히고 있다. 주말과 휴일이면 직지사와 직지문화공원을 찾는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뤄 맛고을 김천이 각광받고 있다.

김천'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구미'전병용기자 yong12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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