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11월이 오면

'시월은 초겨울 되니 입동 소설 절기로다/ 나뭇잎 떨어지고 고니소리 높이 난다/ 듣거라 아이들아 농사일 다했구나/…/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방고래 구들질과 바람벽 흙 바르기/ 창문도 발라 놓고 쥐구멍도 막으리라/ 수숫대로 울타리 치고 외양간에 거적 치고/ 깍짓동 묶어 세워 땔나무로 쌓아 두소/….'

1816년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丁學游'1786~1855)는 1년 농가 이야기를 달마다 읊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서 10월을 그렇게 노래했다. 200년 앞서 1619년, 경북 용궁 출신의 고상안(高尙顔'1553~1623)은 '농가월령'(農家月令)이란 책에서 10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수확을 끝내고 움집을 만들고 울타리를 보수하며 창호와 부서진 벽을 수리했다. 메주를 만들고 다음해 누에를 치는 데 필요한 갈대와 물억새를 벴다. 땔감을 쌓아두어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릴 때 대비했다. 밭을 갈아엎고 고랑을 내어 얼보리(봄에 심는 보리) 파종 준비를 하고 비 내린 뒤엔 목화밭을 갈아엎어 내년 목화 심는 것을 준비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이 땅의 농민들에게 10월은 한가하면서도 바빴다. 추수 뒤 그해 겨울, 다음해 봄 농사 준비에 쉴 틈이 없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 가난으로 헐벗었던 농민들은 수확이 끝났어도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해 농사에 희망을 걸었다.

그 10월이 지금은 11월이다. 음력에서 양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11월엔 24절기 중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8일)과 소설(23일)이 있다. 11월엔 절기 외 특별한 날이 하나 더 있다. 11일 '농업인의 날'이다. 왜 하필 11월 11일일까? 숫자 11은 한자로 표기하면 十一이다. 합치면 흙 토(土)다. 1년 중 흙 토가 겹치는 날은 11월 11일뿐이다. 흙과 농민, 농업을 떠올리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다.

'농업인의 날'은 농산물 시장 개방을 압박하는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한 뒤인 1996년에 제정됐다. WTO는 1986년 농산물 시장 개방을 기치로 내걸고 시작된 우루과이 라운드(UR)의 결과물로 생겼다. 1980년대 UR, 1990년대 WTO에 이어 2000년대엔 자유무역협정(FTA)이 나타났다. 우리 농업을 옥죈 사반세기 농민은 편안할 날이 없었다. 내년 11월엔 희망을 볼 수 있을까.

정인열 논설위원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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