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우리가 죽였어요! 근데 나는 절대로 안 죽였거든요." 닫힌 화장실 안의 청년들 중에서 한 명이 무참하게 살해됐다. 피해자는 생면부지의 한국인이요, 두 명의 용의자는 한국계 미국인들이다. 그들 자신은 목격자일 뿐, 서로 상대방이 범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키득키득 거리며, 단지 재미삼아 죽였을 뿐이라고. 검찰에서 살인죄로 기소한 한 명은 대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애초에 미국 수사대에서 용의자로 지목받았던 한 명은 흉기 소지와 증거인멸죄로 기소돼 복역 중 사면됐고, 재수사를 하려던 중에 관리 소홀로 이미 미국으로 빠져나가 버린 뒤였다. 검찰은 최근 미국 법무부로부터 달아난 용의자를 검거했고, 관련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는 1997년 늦은 밤 한 청년이 목과 가슴 등에 흉기로 찔려 숨진 채 발견된 '이태원 햄버거 가게 살인사건'의 전말이다.
'이태원 살인사건'(2009)은 이에 대한 담담한 일지다. 영구미제로 덮어버린 과거사가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인 미완의 답답한 중얼거림이기도 하다. 뜻밖에도 미국 측이 먼저 용의자를 검거해 수사 자료와 함께 한국 검찰에 선선히 넘겨주었다. 보강수사를 진행하는 중에 피의자가 이미 진술하였던 혐의 사실을 전면 부인하였고, 새로운 용의자가 나타나면서 느닷없이 미궁에 빠져든다. 이후 "우리가 죽였다"와 "나는 아니다" 사이를 마냥 맴돌면서 혼란스러움과 무력감만 더해 갈 뿐이다. 그래서일까, 굴곡진 80년대 격랑을 온몸으로 뜨겁게 헤쳐 온 홍기선 감독이 그려낸 이태원의 밤 풍경치고는 밍밍하게 우물쭈물 겉돌기만 한다.
"그날 밤은 잊을 수 없는 날이야. 우린 둘 다 약이랑 술에 취해 완전 들뜬 상태였다고! 그런데 단지 코리안 한 명 죽었을 뿐인데, 이런 난리람. 내가 더 화끈한 걸 보여줄 걸 그랬어." 담당 변호사에게 무죄판결에 대한 사례를 전하고 돌아서면서 주인공이 내뱉던 이야기다. '합중국 군 당국이 요청을 하면 대한민국 당국은 호의적 고려를 해야 한다.' 극 중 미국 측 후견인이 금과옥조처럼 되뇌던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의 22조5항이다. '대한민국 당국은 합중국 군 당국의 요청이 있으면 재판권 행사를 포기한다. 단, 재판권 행사가 특히 중요하다고 결정하는 경우는 제외한다.' 부속으로 딸려있는 합의의사록의 한 대목이라고 한다. 어느 입맛에 맞춘 '호의적 고려'이고, 누구의 눈높이에 맞추어 '특히 중요하다고 결정'하라는 것일까?
"의사와 환자 간의 처방전과 나라 간 협정문은 어느 누가 보아도 다름이 없도록 명확해야 한다. 제각각 짖고 까불수록 죽어가는 생사람만 애달프다!" 의과대학 시절 노은사님의 일갈이 새삼 들려온다.
송광익 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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