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그리스인

서양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는 현대에 들어 일류 국가로 발돋움하지 못했다. 그리스는 고대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으며 철학을 태동시킨 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질 만하지만 산업화 경쟁에서 뒤져 관광업과 해운업 외에는 이렇다 할 산업 기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스가 유럽의 변방에 머무르며 오랫동안 세계 무대의 중심에 서지 못하다가 최근 국가 재정 위기로 세계 경제의 뇌관이 되면서 달갑잖은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스는 1980년대부터 복지 정책을 대폭 확대, 재정 위기의 싹을 틔웠으며 국민들의 탈세와 조세 회피로 재정 악화가 더욱 가중됐다. 결국 지난해 5월 연금 혜택 축소 등 긴축재정 조치를 약속하고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았으나 상황이 개선되지 않아 최근 국가 채무 불이행의 위기에 다시 몰렸다. 그리스 재정 위기가 세계 경제에도 큰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한 EU 등은 어쩔 수 없이 2차 구제금융 안을 내놓았으나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는 돌연 이를 국민투표에 부치려다 철회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은 연금 혜택 축소 등에 반발하며 시위에 나서고 있는 그리스 국민들의 태도다. 유재원 한국외대 교수 등 그리스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리스인은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우선시하며 철학가들의 후예답게 논쟁을 벌여 잘잘못을 따지는 특성이 강하다. 이번 사태에 대해 국민들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느냐며 정치인들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리고 있는 것도 그러한 기질 탓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 그리스 국민들은 은행 예금을 해지해 금 매입에 나서고 있는데 우리 국민들이 1990년 후반 외환 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을 벌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낙천적이면서도 정열적인 그리스인들은 자유분방하게 삶을 즐기는 대신 열심히 일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생활 방식을 추구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면 알 수 있듯 자유로운 삶을 억눌러야 할 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개인을 앞세우면서도 나라가 망할 정도로 끝장을 보지는 않으며 시간이 걸리지만 방향을 잡으면 저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그들이 한시바삐 국론을 모으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김지석 논설위원 jiseo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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