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흥무관학교 최후의 1인] (3)만주 독립투쟁과 역사의 정의

왜적·일제 침략에 분연히 맞서 싸운 우국충정의 가문

만주 항일 투쟁을 위해 100년 전 매각한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 안동 권씨 부정공파 대애실 문중 종가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후손들이 되찾지 못하고 남의 수중에 있다. 추산의 손자 권대용 씨는 항일투쟁으로 잃어버린 추산 할아버지 생가를 되찾아 가문 일으켜 세우기를 필생의 사업으로 삼고 매일같이 애태우고 있다.
만주 항일 투쟁을 위해 100년 전 매각한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 안동 권씨 부정공파 대애실 문중 종가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후손들이 되찾지 못하고 남의 수중에 있다. 추산의 손자 권대용 씨는 항일투쟁으로 잃어버린 추산 할아버지 생가를 되찾아 가문 일으켜 세우기를 필생의 사업으로 삼고 매일같이 애태우고 있다.

"역사에서 정의가 승리해야 함에도 민족의 재단에 몸 바친 추산의 처절한 항일투쟁과 후손들의 고난은 너무도 가혹합니다. 200년을 이어 온 화려했던 명가의 자취는 만주 항일투쟁의 뒤안길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지요. 우리 근대역사의 안타깝고도 서글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은 항일순국지사 추산 권기일 선생의 일대기가 결코 '한 집안의 비극'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독립운동 십 년 만에 집안이 망하고, 하나 남은 자식은 리어카 끌고 평생 간장장수 하다 죽었다'는 이야기만 남아서는 우리 후손들이 역사의 정의를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 관장은 직접 쓴 '독립운동으로 쓰러진 한 명가의 슬픈 이야기'와 '순국지사 권기일과 후손들의 고난'이라는 책 말미에서 독립운동에 바친 굵고 짧은 추산의 생애와 그로 인한 후손들의 고난을 두고 "이것이 우리 근대역사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비감해지기조차 했다"며 통탄했다.

◆임진왜란 때도 떨친 우국충정

신흥무관학교 최후의 1인 추산 권기일 선생의 집안은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분연히 일어나서 구국의 대열에 동참한 우국충정의 가문이다.

추산의 가문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일본군과 싸웠다. 추산의 독립투쟁과 함께 모두 두 차례나 일본과 싸움을 벌인 역사적 사연이 있는 집안이다. 추산의 15대조로 이조판서와 의정부 우참찬을 지낸 마애 권예의 손자 권전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해전 때마다 선봉장으로 싸우다 이순신에 앞서 순국했다. 이 집안의 가풍이 어떤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정은 당시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의 동생 권지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마다하고 영양 입암면 산해리 문해마을로 이사해 칩거한다. 벼슬을 초개같이 여기는 '난진이퇴'(難進易退)의 선비정신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 마을 반변천 강가의 암벽 위에 자리한 남경대가 바로 당시 권지가 지은 건물이다. 안동시 풍산읍 마애리 낙강정은 권지의 할아버지 권예가 만년에 관직을 떠나 10여 년이나 머무른 곳이다. 추산의 선조는 관직뿐만 아니라 학문도 이뤘다. 부제학에 이른 권예가 낙향하자 그의 학문의 경지를 추앙한 퇴계가 낙강정으로 찾아와 알현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왜적의 침략에 맞선 두 차례의 역사적 사연 탓일까? 추산의 생가가 있는 안동 남후면 대애실 마을엔 입구에 마을 전체를 막아 놓은 듯한 커다란 연못이 파여 있다. 좌측으로 오솔길 같은 좁은 길로만 마을로 들어 갈 수 있도록 돼 있어 마을 입구는 외부에서 기마병이 기습할 수 없도록 요새화된 특이한 구조다. 산기슭에 지어 둔 망루 같은 집도 이채롭다.

◆추산의 계몽사상과 선비정신

추산이 성장하던 무렵인 조선말엽 집안의 가세는 한마디로 대단했다. 증조부 권규한은 1889년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가 됐고, 앞서 조부 권헌봉은 추산이 태어나던 1886년에 통훈대부행사근도찰방에 부임한다. 당시 조선말엽 경상도에는 11명의 찰방이 있었는데 사근도 찰방은 경남 서남부 지역인 사근도(함양 산청 단성 진주 하동 남해)를 관장하는 지방요직이었다. 도 찰방은 종6품이나 통훈대부는 직급이 정3품인 대간과 같다. 부친 권수도도 당시 통덕랑을 지냈다. 여기에다 2천여 두락(약 60만 평)이나 되는 논밭까지 200여 년이나 이어올 정도로 탄탄한 재력까지 갖췄으니 당시의 가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수곡대장 등에 기록된 토지 양을 종합해 볼 때 의성 안평과 안동 남후 일원에만 300~400두락(마지기)의 땅이 한곳에 모여 있었으며, 논밭을 관리하는 노비만도 40명이나 됐다.

대단한 가세였지만 조실부모한 추산은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권헌봉의 품에서 자랐다. 1894년 갑오경장을 지나 대한제국 시기인 18세 때부터 5년간 면의원을 맡아 봤으며, 이때 안동지역의 지도자인 석주 이상룡을 따르며 국내외 정세 등 올바른 시대 흐름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특히 조부가 당시 계몽교육운동을 선도하던 교남교육회 회원이어서 가정에서도 충효사상 등 전통 유림의 꼿꼿한 선비정신과 함께 구한말 개화기 계몽사상의 가치를 모두 익힌 인물로 성장했다.

◆손자를 보내는 조부의 구국일념

문중의 주손으로서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 대를 이어야 할 의무를 지낸 추산이 문중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수 있었을까. 거기에는 문중의 원로 격인 조부 권헌봉의 승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추산의 만주 망명 의사에 처음 얼마간 고심하던 조부는 기꺼이 재산을 내놓기로 결심한다. 대대로 이어오던 종가도 항일운동에 보태라며 노비의 집인 이웃 초가를 얻어 이사한다. 그렇지 않아도 조부는 1910년 나라를 잃게 되자 예안의병장을 지낸 향산 이만도 선생과 이중언, 유도발, 권용하, 이현섭, 김택진 등 안동지방 선비들이 잇따라 목숨을 던지는 자정순국 행렬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탄식해 오던 터였다. '빼앗긴 나라에서 살아 무엇을 한단 말인가.' 자신은 이미 늙고 병들었기에 손자인 추산에게 구국의 희망을 건 것이다. 대대로 이어온 재산과 선산을 버리는 아픔과 가족들과 헤어지는 생이별의 고통을 혼자 다 감내해야만 했다.

후손들이 말하는 당시의 모습은 이렇다. 소달구지에 살림살이를 싣고 식구들과 함께 머나먼 만주로 떠나기 위해 길에 나선 추산은 먼저 할아버지 초가를 찾아 큰절을 했다고 한다. 흙마당에 엎드려 목놓아 울면서 기필코 나라를 되찾겠노라고 평소와 다름없이 집을 나서며 '출필고'(出必告)를 했지만 다시 돌아오겠다는 '반필면'(反必面)은 기약이 없었다. 올해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11년 늦가을, 자신의 손으로 키운 집안의 주손인 손자를 이국만리 만주땅으로 보내야만 하는 기막힌 처지의 조부 권헌봉은 추산이 떠난 후 억장이 무너져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지내다 3년이 채 못 된 1914년 말 결국 몇몇 떠나지 않은 노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히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고야 만다.

◆재점화된 만주 서간도 독립운동

토지 일부는 노비와 소작농들에게 나눠 준 다음 추산은 노비 문서를 불태운다. 당시 노비해방은 1894년 공식적으로 이뤄졌지만 당시 큰 집안에선 1910년까지도 노비제도가 유지되기도 했다. 막대한 재산 처분은 1911년 겨우 내내 이뤄졌다. 이듬해 봄 만주 망명길엔 추산의 아내 김성과 두 살배기 딸 귀향, 어머니와 동생 혁룡과 혁기, 그리고 제수씨 둘 등 모두 아홉이었다. 처음엔 소달구지를 타고 김천으로 나간 다음 열차를 이용해 추풍령을 거쳐 신의주로 이동한 후 얼음 덮인 압록강을 건너 단동을 거쳐 통화로 찾아갔다. 그 많은 문전옥답을 버리고 허허벌판 만주 황량한 서간도에 이른 추산의 가족들은 먼저 땅을 일군다. 수백여 년 동안 사대부 집안에서 대대로 수많은 노비들의 손을 빌려 살다가 직접 괭이와 호미를 쥐고 손에 피가 맺히도록 농사일에 매달려야 하는 처지가 됐다.

만주에 도착하자마자 추산은 곧장 신흥무관학교 이전 확장 사업에 뛰어든다. 먼저 망명한 석주 이상룡 등 안동사람들이 1911년 서간도 지역의 지독한 흉년으로 초기 독립운동이 극심한 어려움에 봉착한 상황이었기에 재건사업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이때 마침 도착한 추산의 가족들에 의해 꺼져 가던 만주 독립운동에 새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었고 그가 마련해 간 넉넉한 자금은 안정된 동포사회 건설과 신흥무관학교 재건에 매우 요긴하게 쓰였다.

추산의 도만을 밑거름으로 석주 이상룡은 다시 힘을 모아 경학사에 이어 1912년 여준 등과 함께 동포 자녀들을 민족적인 인물로 길러내는 교육회를 조직했다. 당시 나이 25세인 청년 추산은 여기에서 경리와 재무를 책임지는 학도감을 맡아 항일운동의 방향을 보다 더 역동적으로 변모시킨다. 또한 부민단의 재정담당과 정치외교위원으로 활약하는 등 당시 석주 이상룡의 지도 아래 이청천, 윤세복, 김창환, 윤기섭, 최명수 등 만주 독립운동 지도자급 인사들과 긴밀하게 교류하며 한족회 결성에도 참여하는 등 오로지 구국의 일념을 불태워 간다.

1911년부터 독립운동 근거지 마련으로 시작된 만주 이주동포 한인사회 구축은 추산의 재건노력으로 다시 재점화되면서 추산이 순국하기 직전인 1920년 초까지 이어져 한때 통화시 유하현 일원에 정착한 이주동포가 2만5천여 명에 이르기도 했다. 이때까지의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군은 무려 7천 명에 달하게 된다. 이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면서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역사의 기록으로 이어진다.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사진'강병두 사진작가 plmnb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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