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한 인생길. 이리저리 휩쓸리고 흔들리다 보면 자신의 '꿈' 하나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법이다. 한우물 파기에 매진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어도 몇 번의 실패에 부닥치다 보면 '포기'라는 단어가 이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그래도 이 악물고 자신이 세운 목표를 따라 똑바로 한 길만 내디뎌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이 있다.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 삼아 수십 년 외길을 고집한 이들의 사연을 들어봤다.
◆난 박사 이대발(45'대구시 수성구 지산동)
평생 춘란 연구에 일생을 바쳐온 관유정(난 아카데미) 이대발 원장은 "난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진정 관심을 쏟는 것은 난 자체가 아니다. 난이 사람에게 주는 행복감과 정서적 안정을 통한 치유 효과에 반해 난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굳이 비싼 수백, 수천만원짜리 난일 필요는 없습니다. 흔하디 흔한 난초라도 키워 보면 그 초록색이 전해주는 생명력과 새로운 촉이 뻗어나 조금씩 커가는 기쁨에 매료될 겁니다."
이 원장은 난 가꾸기가 노후 생활을 위한 준비로도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중년에 접어들어 난 가꾸기에 입문하면 노후의 소일거리가 될 뿐 아니라, 심리적 안정 효과와 더불어 소소한 경제적 수익까지 가져다준다는 것. 그는 "춘란은 가격대가 높은 편이어서 새로운 촉이 하나 자라나면 종류에 따라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에 거래가 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 원장이 난초에 입문한 것은 1987년 군에 입대하면서부터다. 원예병으로 난을 가꾸는 임무를 맡으면서 '영창 가기 싫어서' 죽기 살기로 난을 공부했다며 웃었다.
그는 군 제대와 함께 일생을 난초에 걸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시작했던 화원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면서 그는 스승을 찾아 나섰다. 이 원장은 스승인 정정은 선생에게 난을 사사하기 위해 그의 취미를 귀동냥한 뒤 볼링장에 취직까지 할 정도로 치밀함도 있었다. 볼링장에서 눈도장을 찍은 스승 앞에서 어느 날 난 관련 자료를 한 아름 안고 가다 넘어지는 '쇼'를 연출하면서 극적으로 스승의 난원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마치 소림사에서 무술을 배우듯 6개월 동안은 난 화분의 돌 씻는 일만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는 "나중에 알고 봤더니 돌을 제대로 씻는 것만으로도 난이 제대로 살아나는데 60%를 좌우한다고 하시더라"며 "그 후 손님 응대법과 거래처까지 아낌없이 모든 가르침을 다 주셨다"고 했다.
이후 이 원장은 '너그럽고 넉넉한 사람들이 쉬어가는 곳'이란 의미의 관유정(寬裕停)이란 이름의 난원을 내고 '난 아카데미'를 통해 난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난에 대한 여러 문제를 상담해주고, 무료 분양까지 하게 된다. 또 2008년 행정안전부 선정 임업 분야 신지식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흔히 난은 키우기 까다로운 식물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상식입니다. 우리나라 소나무 아래서 자라는 3가지(맥문동'이끼'춘란)에 들어갈 정도로 생명력이 강한 식물이지요. 난을 키우는 분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물을 적게 줘서인 경우이고, 두 번째는 온도와 적절한 햇빛 공급에 유의한다면 어렵지 않게 난초를 기를 수 있습니다."
◆빵 박사 손노익(43'대구 서구 내당동)
포항 죽장 깊은 산골 출신인 '풍미당' 손 대표는 1984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구로 나와 제과제빵을 배웠다. 한 끼는 국수나 감자로 때워야 했던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그에게 빵을 굽는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는 마치 '천국의 향기'와도 같았다. 하루 3, 4시간만 잠을 자고 일을 해야 하는 고단한 빵집 생활. 그걸 견딜 수 있게 해 준 것이 바로 빵냄새였다. "이제는 오븐 소리를 듣고 냄새만 맡아도 빵이 잘 구워졌는지 아닌지를 알아챌 수 있습니다. 이래 봬도 28년 세월인걸요."
그가 처음 자신의 빵집 문을 연 것은 1992년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서였다. "당시에는 빵이 아주 고급 음식이었어요. 초등학교 주문만 해도 엄청났을 정도니까요. 자본금이 없어 대출로 시작했는데 2년 만에 대출 다 갚고 지금 있는 서구 내당동에 가게를 낼 돈까지 마련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후 빵집은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프랜차이즈 브랜드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동네 빵집이 설 곳을 잃은 것이다. 그는 이것을 '공습'이라고 표현했다. "자본으로, 물량으로 막 퍼부었지 않습니까. 동네 빵집마저도 힘의 논리로 지배되는 시대가 되니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맛 하나에 승부를 걸고 '풍미당'이라는 브랜드를 지켜나갔다. 그는 "정직하게 만드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빵의 깊은 맛을 내기 위해 마가린보다는 천연 버터를 쓰고, 건강을 생각하는 소비자들을 위해 인공색소 대신 치자나 녹차가루 등을 이용한 천연색소를 사용해 색을 냈다. 사람이 먹는 음식이다 보니 당연히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원재료'라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한창 인기리에 방송됐던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서 구일중 역을 맡은 탤런트 전광렬 씨가 아침 일찍 일어나 마치 태극권이라도 하듯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공기 중의 습도를 가늠하고 밀가루를 손으로 비벼보는 것도 괜한 짓이 아니었다. 손 대표는 "빵맛을 좌우하는 것은 습도"라며 "날씨에 따라 들어가는 우유량에 차이가 나고 반죽의 농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계량화된 레시피로 빵의 참맛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동네 마트 한쪽에 작은 공간을 빌려 동네 빵집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손 대표. 그의 꿈은 카페를 겸한 빵집을 여는 것이다. "요즘은 빵집이 음식을 사는 곳이 아니라 휴식을 위한 공간의 형태로 변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트렌드에 맞춰 저도 요즘은 다양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꿈이 있다면 빵을 만들려는 후진을 양성하는 것이다. 손 대표는 "워낙 프랜차이즈가 많다 보니 요즘은 제대로 빵을 만들어보겠다는 사람을 구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정말 제 돈을 투자하더라도 맛있는 빵 하나에 인생을 걸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하고픈 마음입니다."
◆식초 박사 구관모(65'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
가파른 벼랑에 선 심정이었다. 마흔의 나이에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가진 재산마저 없었다. 택시운전 10년에 뇌졸중이 온 데 이어 위장병부터 신장염, 간염 등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내와 자식을 판잣집 월세방에 몰아넣고 집 보증금과 개인택시를 판 돈을 가지고 1988년 경남 합천 노태산 골짜기로 들어갔다. 아직 초등학생인 아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지만 모든 것을 떨쳐내고 한곳에만 온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 배수의 진이다. 성공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다는 심정으로 매달렸다.
구관모식초의 구 대표는 '식초'에 인생을 걸었다. 고(故) 안현필 씨의 '삼위일체 장수법'이란 책을 읽고 난 뒤 우리나라에서 그 맥이 끊겨버린 천연식초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늪에 빠진 인생을 다시 쓰는 '마지막 승부수'이기도 했다.
구 대표는 "각종 책을 섭렵하고, 5년 동안 전국에 할머니들을 찾아다니며 식초 만드는 비법을 구했다"고 했다. 하지만 '손을 넣어 휘휘 저어질 정도로 물을 부으면 된다'는 식의 설명만 듣고 식초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수백 차례 시행착오를 되풀이해야 했다. 누룩을 띄워 술을 만드는 것도 어려웠고, 이를 다시 숙성시켜 식초가 되는 과정에서 변질도 잦았다.
처음 천연 현미식초 만들기에 성공한 것이 1993년. 하지만 그게 성공이 아니었다.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자 쉽게 변질되는 식초의 성격상 초항아리들이 부지기수로 썩어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집념이 하늘에 통했던 걸까. 수소문 끝에 '식초의 달인'이라는 할머니를 만나 경주 최씨 문중 비법인 송엽초와 다슬기 식초를 배웠고, 이것은 그의 끊임없는 연구를 거쳐 발명특허로 등록됐다. 현재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옛날 식초 장수법' '초밀란으로 간암 다스리기' '활성산소를 다스리는 초밀란 건강법' 등의 책도 펴냈다
식초는 크게 알코올식초와 천연식초로 나누어진다.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식초는 대다수가 알코올을 희석시킨 것이다. 천연식초는 술을 빚은 뒤 이를 3년 이상 숙성시켜야 제대로 된 빛깔이 나오는데다, 욕심을 내서 물을 한 바가지만 더 섞어도 변질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대량 제조가 어렵다.
구 대표는 "천연식초는 유기산과 구연산, 초산 등의 성분이 풍부해 살균과 해독 성분이 뛰어나다"고 강조했다. "우리 조상들은 '초맛이 가면 집안이 망할 징조'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식초를 신성시했다는 의미지요. 심지어 식초 항아리 이름도 '초두루미'라 불렀습니다. 불로장수의 상징인 학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천연식초를 통해 건강을 되찾은 그는 이제 발효 공학을 전공하고 있는 그는 아들 익현(30) 씨와 함께 식초 맛처럼 깊이 있고 진한 제2의 삶을 열어가고 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