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가을 나들이

가을 나들이하기 전에 우선 요기부터 하기 위해 웰빙우동을 끓인다. 물을 붓고 수프나 장을 함께 넣어 끓이기 시작한다. 큰 무가 있길래 조금 자르고 양파를 썰어 넣는다. 파도 한 줄기 썰고 양배추도 성큼 썰어 넣고 국물이 끓기 시작하면 면을 담고 청양고추와 마늘을 다져 넣는다. 결정적인 찬스에 달걀도 툭 깨고 김치도 몇 조각 넣으면 웰빙우동이 완성된다. 그리고 땀을 흘리며 먹는다.

어제는 오페라 구경을 했다. '집시남작'이라는 오페라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오페라라 환상적이고 동화 속에 나오는 장면 같아서 가을을 보내면서 역시 오페라나 음악회 정도는 한 번 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같이 간 후배가 재미있었다고 하니 구경한 보람도 느꼈다. 초대권을 구해준 지인에게 다시 한 번 감사 드린다.

나는 걷는다. 어지간한 버스길은 걸어보는 것도 도시에 사는 여유일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두어 코스 가는 건 좀 싱거운 일일 것 같고 퍽 나쁘지 않으면 건강상 걷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정한 코스는 걸어본다. 시골에서는 종종 걸어다녔다. 버스 시간이 애매하여 걷다 보면 차가 오겠지 하고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며 걸었다. 도시의 길은 가로수 이파리가 떨어져 겨울을 재촉하는 것 같아 을씨년스럽지만 시인인 양 폼을 잡으며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는 걸어다닌다.

M화방에 도착한다. 대학 입학 때부터 단골화방인데 외상값이 꽤 된다. 한도 수위가 높다 보니 빨리 좋은 일이 생겨 평소에 퍼뜩 외상값을 갚게 해달라고 빌어본다. 차도 마시고 점심시간을 맞추면 식사라도 같이 할 수 있는 쉼터이다.

'폴 오스트'의 소설들을 생각한다. 굶기의 예술이니, 빵 굽는 타자기니 지독스럽게 글을 쓰는 자전적 소설 같은 이야기 속에는 행운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환상들이 현실화되는 장면이 많다. 굶어 쓰러질 지경에 멋진 여성이 우연을 가장하여 나타나 작가를 물심양면으로 돕겠다고 나서기도 하고, 죽으라고 안 되던 출판사 계약이 마지막으로 성사되어 인쇄료를 받는다든지, 이웃 할머니가 유산을 물려주든지, 평소 전혀 만나지 못하던 외숙부가 "너의 어머니가 남긴 것"이라며 돈가방을 던져주는 등 운이 한방에 바뀌는 일이 나타난다.

K문화상 수상! 나는 수상소감을 적는다. 아무 연고가 없고 성격상 게을러서 별 하는 일 없이 바쁘게 보내고 있었는데 K문화상을 받게 되었다고 연락이 와서 세상이 달라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상금이 있다고 하니 가장 먼저 번쩍 떠오르는 것이 밀린 재료비 외상값을 몽땅 갚아야겠다는 마음이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조선시대 단원 김홍도가 그림을 팔아 천 냥이 생겼을 때 제일 먼저 한 것이 오백 냥을 뚝 떼어 자기가 좋아하는 매화 한 그루를 사고, 물론 그림을 염두에 둔 행동이지만 그리고 이백오십 냥은 집 살림에 보태 쓰라고 했으며 나머지는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는 일화가 있다. 삼십여 년간 작가가 되기까지 단골로 재료를 대어 준 화방이 떠오르는 건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며 이제껏 고마움을 갚아야 하는 게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시장통을 지나고 음악인이 운영하는 술집을 지나고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의 조그만 찻집에 도착하면 방천시장이 나오는데 여기에 오면 부모님 생각이 가끔 난다. 부친 일생에 행운이 한 번 있었다.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장사를 하실 때 거래 손님들과 술 한 잔 하게 되었는데 술집 주모 왈, "K소주에서 경품을 걸어서 뚜껑을 따면 복권같이 상품을 준다"면서 권유해 K소주를 청했는데 뚜껑 속에 은두꺼비가 나와서 그 시절 코로나 택시 한 대를 타서 그 여주인 포함한 네 분이 상금을 나누어 축하잔치를 벌이고 아버님은 달동네에 사는 어린 자식들에게 맛있는 것 실컷 먹게 해준다고 약속을 하셨다. 40년이 더 지난 이야기지만 K문화상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싶어서 그 시절 이야기가 떠오른다.

며칠 전에는 리모델링하고 있는 문화창작발전소에 들러 자문회의를 했는데 이곳이 완성되면 대구 작가들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새롭게 생겨 점점 나은 조건에서 작업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 아트페어가 끝나고 미술시장이 움츠러든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구경 온 사람들은 많았고 큰 화랑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문화창작발전소도 만들고 시민들이 차츰 예술과 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서 겨울이 온다 해도 조금 안심이 된다. 지난 시절 밥은 굶었는데 술 인심은 좋아서 빈속에 먹어 해롱해롱했던 시절이 생각이 난다. 좀 더 나은 예술의 도시 대구를 기대하며 가을 나들이를 한다.

정태경/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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