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혼] 제7부-세계 속의 경북정신 <2>도전과 네트워크의 혁신가 장보고

바다와 사람 연결해 동북아 장악…'블루 실크로드'를 보았다

1천여 년 전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의 중국 내 핵심 거점인 중국 영성시 석도항의 현재 모습니다.
1천여 년 전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의 중국 내 핵심 거점인 중국 영성시 석도항의 현재 모습니다.
영성시 석도의 적산법화원 내 장보고 기념관 앞마당에 있는 8m 높이의 장보고 청동상의 모습이다.
영성시 석도의 적산법화원 내 장보고 기념관 앞마당에 있는 8m 높이의 장보고 청동상의 모습이다.
영성시 석도의 적산법화원 내 장보고 기념관의 전경이다. 5개 전시실에 기념사업회가 기증한 150여 점의 유물이 관광객을 맞고 있다.
영성시 석도의 적산법화원 내 장보고 기념관의 전경이다. 5개 전시실에 기념사업회가 기증한 150여 점의 유물이 관광객을 맞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국가 표준 영정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국가 표준 영정

지난달 18일 오후 중국 산동반도 동쪽 끝의 영성시 석도항. 갈매기의 마중을 받으며 녹슨 어선들이 조업을 끝내고 입항했다. 검게 그을린 인부들은 손을 바삐 움직여 잡아온 생선을 부두로 내렸다. 몇몇 어부들은 비늘을 털어내며 그물을 손질했다.

작고 평범한 어촌인 석도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적산(赤山) 기슭에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 있었다. 824년 장보고가 창건한 이곳은 845년 당(唐) 무종 때 불교 탄압으로 파손됐다가 천년이 지난 1990년에 중건됐다.

법화원 입구에서 10여 분 걸으니 다섯 개의 전시실로 구성된 장보고기념관이 나왔다. 앞마당에 8m 높이의 거대한 장보고 청동상이 서 있고, 건물 안에는 석도항(당시 적산포)에서 상단을 지휘하는 장보고의 그림이 한 벽면 전체에 전시돼 있었다.

기념관의 담상완(譚尙婉) 안내원은 "석도항은 당나라 때 번성했던 무역항이며 신라인들이 입당하는 '황금항로'의 종착지였다"며 "장보고는 이곳을 근거지로 국제 무역을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1천여 년 전 석도항과 적산 일대는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주도한 장보고의 중국 내 핵심 거점이자 전초기지였고, 그 중심에 재당(在唐)신라인들의 정신적 안식처이자 구심점 역할을 했던 적산법화원이 있었다.

◆혁신가 장보고의 '무한도전'

장보고는 도전정신으로 삶을 개척한 혁신가였다. 한반도 남쪽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난 장보고는 궁복(弓福), 궁파(弓巴)로 불릴 만큼 활쏘기와 무예가 출중했지만 신분차별이 심한 신라사회에선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꿈 많고 성취 욕구가 강한 장보고는 10대 후반 과감하게 넓은 대륙 당나라로 건너갔다. 장보고는 서주(徐州) 무령군(武寧軍)에 들어가 평로군(平盧軍)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역할을 해 819년 30세 무렵 소장(小將)에 임관되는 성공을 거둔다.

이듬해 장보고는 다시 도전을 감행한다. 10년 넘게 활동한 무령군을 떠나 산동반도의 적산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재당신라인 자치기구인 신라소의 책임자를 맡아 적산법화원을 짓고 신라인들을 결속했다. 점차 무역에 눈을 뜬 장보고는 연안과 운하 유역에 퍼져있던 신라방과 신라소를 연결, 물류 흐름을 주도하면서 부(富)를 쌓았다.

신라인들이 노예로 팔려나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장보고는 직접 '신라인 구하기'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828년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에게 해적 소탕을 건의했다. 왕은 이를 받아들여 장보고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로 임명하고 군사 1만 명을 내어주었다. 장보고는 청해진(현재 전남 완도)을 근거지로 1년 만에 해적과 노예무역을 근절해 해상에서 신라 사람을 사고파는 자가 없어졌다.(중국 신당서'新唐書)

장보고는 해적소탕 임무를 마친 군사지기 청해진을 또 다시 혁신해 국제무역항으로 재탄생시킨다. 장보고 선단은 10년 만에 동아시아 무역의 중심세력으로 떠오를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네트워크'를 장악한 전략가

장보고는 거점과 흐름을 장악했다. 장보고에게 바다는 장벽이 아니라 '블루 실크로드'였다. 신라, 당, 일본에 거점을 확보하고 수(水)와 인(人)의 연결망을 만들었다.

장보고의 핵심 거점은 청해진. 해적 소탕과 동아시아 무역에 있어서 지리적 이점을 최대화하고, 신라 중앙권력에서 떨어져 정치적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는 최적의 거점이었다. 청해진을 기본 축으로 신라인이 많이 진출한 산동반도, 당과 신라의 물자가 필요했던 일본 하카다 지역을 거점으로 동북아 해상과 연안, 내륙 운하를 거미줄처럼 엮어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나아가 이슬람 상인들이 거쳐 오는 인도와 동남아 항로를 연결해 시장을 넓히고 동서양의 무역망을 하나로 엮었다.

네트워크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부(富)는 물론 지식과 정보, 기술자들이 흘러들어왔다. 승려, 외교관, 사절단, 유학생들이 장보고 선단을 거쳐 갔다. 외국어 능통자와 선박 건조와 항해 기술자, 각 나라의 생생한 시장 정보가 모였다. 이를 바탕으로 장보고는 창조적인 비즈니스를 했다. 정부의 무역대행, 공식사절단 안내, 여객 운송, 선박 건조 및 수리, 통역, 선원 공급, 숙박, 정보 등 종합 서비스를 제공했다.

장보고는 시대를 읽는 전략가였기에 바다를 장악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해 기회를 선점, 번영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삼성경제연구소 한창수 수석연구원은 "장보고는 당시 세계 중심국가였던 당나라에서 한 차원 높은 안목으로 세계정세를 판단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당의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조공(朝貢)무역이 민간무역으로 바뀌는 전환기였고, 당의 해상주도권 상실과 신라사회의 혼란으로 동북아 해상에서 힘의 공백이 생긴 상황을 꿰뚫어 본 것이다.

◆닫힌 바다에서 열린 바다로

신라 왕권을 둘러싼 정치 투쟁이 극심했던 841년. 장보고는 반대 정치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리더를 잃은 청해진은 '공중분해' 됐다. 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폐쇄하고 백성들을 벽골군(전라북도 김제)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그 후 한반도의 바다는 닫혔고, 장보고는 반역자로 기록되며 역사의 '유배지'에 갇혔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장보고를 다시 불러내고 있다. 한'중'일의 관련 유적지 발굴과 다양한 기념사업, 영화와 드라마, 각종 연구와 보고서 등 다방면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해상왕장보고연구회장 김문경(81) 숭실대 명예교수는 "바다를 이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흩어져있던 신라인들의 역량을 결집한 장보고의 진취성과 혁신성은 오늘날의 시대 정신과 통한다"며 "동북아시대의 도래와 세계화의 도전에 마주한 우리는 그의 도전정신과 혜안을 소중한 교훈과 자산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글'사진 서광호기자 kozm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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