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가 살던 9세기 무렵 당나라에 거주하던 신라인들은 해상활동과 교역을 주도했다. 이들은 산동반도 등 중국의 동해안과 초주, 양주 등 양자강과 대운하 지역을 따라 광범위하게 거주하면서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활동했다.
당시 당나라는 체류하는 이민족의 지위를 보장하는 율령을 제정하는 등 개방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또 신라와 당의 지속적인 교류와 우호관계, 지리적 접근성 등의 이유로 많은 신라인들이 당으로 모여들었다. 견당사(遣唐使)라고 불리던 사신단, 학문을 익히려는 유학생, 불법을 배우려는 구법승, 경제적 난민, 정치적 망명객 등이 머물렀는데 그중 교역을 하던 상인들이 주를 이루었다.
신라인 집단 거지주인 신라방(新羅坊)은 배의 정박과 보급을 위한 주요 항구에 자리 잡았다. 해상 교역로에서 신라인들은 목탄운송업, 조선업, 선박수리업, 상업, 농업 등에 종사하며 무역선단을 지원했다.
일본의 구법승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838∼847년)를 보면 신라인들의 활동이 잘 드러나 있다. 엔닌 일행은 산동반도의 남해안에서부터 내륙의 운하에 이르기까지 신라인 선원과 배를 이용했다. 심지어 신라인이라고 속여 여행의 편의를 제공받은 경우도 있었다. 당의 한 지방 관청이 체류 허가를 거부하자 신라소 감독관의 도움으로 허가를 받기도 했다. 이들은 또 신라 출신 무관 이원좌의 보호를 받아 장안과 오대산을 이동했고, 신라인 통역관 김정남(金正南)의 안내로 중국인들과 교섭했다.
신라방에는 불교 사찰인 신라원(新羅院)이 있었다. 장보고가 적산촌에 세운 법화원이 대표적이다. 839년 법화원에는 불당과 200여 명이 들어가는 강당, 승려 27명이 머무르는 승방, 수십 명을 수용하는 객방 등이 있었다. 비구와 비구니 등 29명이 상주하면서 신라 풍속 그대로 경전을 강의하거나 예배를 하며 복을 빌었다.
신라방에는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도 있었고 책임자인 신라소총관(新羅所摠管) 역시 신라인이 맡아 자치권을 행사했다.
서광호기자 kozm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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