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사진의 도시 대구

"사진의 발명에 따라 예술 자체의 뜻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1892~1940)의 말이다.

19세기 사진의 등장은 회화에 있어 재현적 기능을 순식간에 무력화시켰다. 이전의 미술은 풍경이나 인물 등을 표현하는 점에서 가치 있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의 사진은 그때와는 또 많이 바뀌었다. 생활 속으로 깊게 파고 들어온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축제만 봐도 그렇다. 프랑스에서 열리는 파리포토(Paris Photo)는 처음엔 프랑스에서조차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주로 미국의 갤러리스트들이 참가한 아주 작은 규모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전 세계 사진의 흐름과 경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대규모의 행사가 되었다. 현대사진의 동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세계 최대 사진의 장이 된 것이다.

대구에서도 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진행사인 대구사진비엔날레가 2년마다 열리고 있다. 작년에는 제3회 대구사진비엔날레를 성황리에 마쳤고, 대구시에서는 내년에 있을 네 번째 행사를 준비 중이다.

대구에서 왜 이런 대규모 사진행사가 열리게 된 것일까? 1930년대, '대구의 최계복, 회령의 정도선'이라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로 대구는 국내에서 역사적으로 사진 문화가 가장 왕성한 도시였다. 최계복 선생은 일본에서 사진을 배우고 일본 공모전에서 수차례 입상하면서 그 실력을 인정받은 후 대구에서 사진 모임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대구 사진'의 시작이었다. 한국 사진의 1세대 작가인 그를 중심으로 한 대구의 사진가들은 당시 신학문이었던 사진술을 대구에 전파했고 이를 계기로 대구는 한국 사진의 중심지로 향하는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 후 1960년대에 들어서 사진의 수도라 불릴 만큼 대구는 한국 근대 사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단일 도시에서 가장 많은 사진학과가 개설되었으며 이곳에서 수많은 사진 전공자들을 배출해 냈다. 이처럼 대구 사진의 역사가 한국 사진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지역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구시와 대구지역 사진가들은 사진의 국제화에 뜻을 두고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2005년에 있은 대구이미징아시아를 출발로 점차 그 모습이 확대되어 대구사진비엔날레가 진행되게 된 것이다.

대구사진비엔날레는 아시아 최대의 사진축제이자 대구를 알리는 중요한 행사로 매번 그 규모를 키워가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대구 사진의 역사적 자료 관리, 보존에도 힘을 모을 때다. 대구 사진의 역사가 한국 사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대구 근대 사진 아카이브(Archives) 작업에 나서야 한다. 여러 방법 중에 사진미술관의 건립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송 호 진 대구대 영상애니메이션디자인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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