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마지막 달력 한 장이 남았다. 뜨거운 커피 한 잔에 몸을 녹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지는 계절이다. 프랑스 작가 타테랑은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아름답고, 사랑처럼 달콤하다"고 커피를 예찬했다. 현대인들의 생활에서 이제는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이 된 커피. 한때는 귀족들의 사치스런 취미로 또 수탈의 상징으로 기억되기도 했지만 이제 커피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달콤한 휴식이자 문화의 상징이다.
길을 걷다 보면 한 집 건너 한 집이 커피전문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커피전문점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우리나라. 늘어나는 커피점 숫자만큼 입맛 까다로운 커피 마니아도 늘어만 간다. 올해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World Barista Championship'WBC)에서 1위를 거머쥔 알레한드로 멘데즈(Alejandro Mendez'24'엘살바도르). 커피 강연을 위해 지난달 말 대구의 '커피명가'를 찾은 그를 통해 '맛있는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커피 생산지에서 바리스타 챔피언이 탄생한 것은 처음이라고 들었다.
▶지금까지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에서는 유럽과 미국 출신이 휩쓸다시피 했다. 하지만 올해 그 기록이 깨졌다. 커피 생산지로 유명한 엘살바도르 출신으로 WBC 우승을 한 것은 처음이다. 사실 엘살바도르는 전 국민이 커피를 즐기기는 하지만 커피 문화가 발달한 곳은 아니다. 국민 대다수가 슈퍼마켓에서 싸구려 커피를 사다 끓여 마시는 정도다. 이제 우리도 달라지고 있다. 사람들이 점점 질 좋은 커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예전에는 최상품 커피는 전량 외국으로 수출됐지만, 이제는 국내 소비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우승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에스프레소 커피를 통해서라고 들었지만, 개인적으로 드립 커피와 에스프레소 커피 중 어떤 것을 더 선호하나?
▶에스프레소와 드립은 그 사이즈에서 우선 차이가 있다. 에스프레소는 적은 양의 커피를 강한 압력을 이용해 빠르게 뽑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빨리 만들고 빨리 마실 수 있는 반면, 핸드 드립은 처음부터 많은 양을 목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터 안에 모든 커피가 함축하고 있는 맛과 향을 물과 함께 천천히 뽑아내는 것이 매력이다.
에스프레소 추출을 통해 바리스타 챔피언이 되긴 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는 드립 커피다. 뜨거운 햇살에 커피 콩이 자라고, 이것을 수확해 최상의 상태로 로스팅하는 등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진 커피에 담긴 모든 열정이 천천히 드립을 하는 시간 동안 다 배어 나는 것 같다.
베리에이션(카페라테'카푸치노 등) 커피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에스프레스를 추출해 커피를 만들 때는 커피의 원형대로 유지된 가장 순수한 상태의 그냥 에스프레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한 잔의 커피 맛을 좌우하는 데는 여러 요소가 있다.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나?
▶맛있는 한 잔의 커피는 굉장히 오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로스팅이나 물, 바리스타의 스킬 등 뭐 하나가 잘못됐다는 지적은 정말 불공평(unfair)한 것 같지만 굳이 맛을 좌우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자면 '커피빈'이라고 생각한다. 최고의 커피를 즐기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이 방금 로스팅된 커피콩을 구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정에서 맛이나 향의 손실을 최소화하려면 그라인더로 그때그때 조금씩만 갈아 마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산지에서 팔리는 커피 가격과 유럽이나 한국의 어느 커피숍에서 팔리는 커피 가격은 수십 배의 차이가 난다. 커피 원산지 국민으로서 부당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한국에서 5천원에 팔리는 커피가 엘살바도르에서는 70센트(700원가량)에 불과하다. 분명 가격 차이가 크다. 하지만 커피는 어떻게 블렌딩을 하고 로스팅을 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질 높은 커피가 비싼 가격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문제는 질 낮은 커피를 사들여 비싼 가격에 파는 것이다. 엘살바도르 주민들은 노동의 정당한 대가도 지불받지 못하는 데 비해 누군가는 질 낮은 커피를 속여 팔며 큰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한국을 비롯한 미국 유럽 각국에서 공정무역(fair trade)이라는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것은 커피 산지의 주민들로 하여금 더 좋은 커피를 만들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현재 중남미 국가들은 막 성장하고 있는 단계의 나라들이기 때문에 이런 국제적 배려가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당신에게 커피란 어떤 의미인가?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들한테 행복을 주는 수단이 커피가 됐다. 손님이 "내 생애 가장 맛있는 커피를 마셨다"고 말해 주는 것이 바리스타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이고, 또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적어도 한순간의 행복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기분이 좋다.
커피는 내게 세상을 더 작아지게 만들어준 매개체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안도 제대로 다녀보지 못했던 내가 WBC에서 우승하면서 미국, 영국,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러시아, 이탈리아, 에스파냐, 일본, 한국 등 전 세계를 다니며 강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한국의 커피 문화에 대해 어떻게 보나?
▶아직 한국의 커피 문화를 제대로 볼 기회는 없었지만, 주위에 커피숍이 정말 많은 것을 볼 때 커피에 관심이 많고 즐겨 마신다는 사실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인데 커피 강연에 관심을 갖고 열정적으로 수업을 듣는 이들이 많은 걸로 봐서는 잠재력이 무한하다고 본다.
꿈이 엘살바도르가 아닌 세계 어느 곳에 내 이름을 건 커피전문점을 여는 것인데, 커피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봐서는 한국에서도 가능할 것 같다.
-당신이 지금까지 마셔본 최고의 커피는?
▶커피 맛은 굉장히 주관적인 것이다. 기분과 분위기에 따라 같은 맛의 커피도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는 법이다. 굳이 비싼 원두를 사용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얼마나 그 커피에 마음과 정성이 가득 담겼느냐도 맛을 좌우하는 요소 중 하나다.
내가 지금껏 하루 6, 7잔씩 늘 마셔온 커피 중 가장 맛있게 마신 커피는 우연찮게도 한국에 오던 날 아침에 마신 커피다. 친구가 "한번 마셔볼래?"라며 아무렇지 않게 건넸는데 너무 강렬한 맛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내일 한국에서 또다시 누군가가 건네주는 생애 최고의 커피를 마실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