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새벽 시간에 미국의 대학에 입학한 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울먹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내 인생 물어내세요! 저를 왜 이렇게 길렀어요? 정말 죽고 싶어요! 학교 수업에서 다른 학생들은 모두 자신의 의견을 잘 발표해 교수와 친구들로부터 칭찬도 듣는데, 저는 한 마디도 못했어요. 오늘도 수업 시간에 발표를 잘한 흑인 학생에게 동료 학생들이 몰려 칭찬도 하고, 같이 공부 하고, 친구도 하자고 하는데 저에게는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았어요. 거의 왕따 수준이에요."
이 내용은 지역의 한 교장 선생님이 자신의 딸 이야기를 내게 들려 준 것이다. 딸은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 하였고, 중'고등학교 때는 학교 수업을 마친 후 학원으로 가는 등 밤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하는 등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미국 대학으로 유학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수재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공부를 잘 한 학생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가서도 잘 적응하리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 번도 부모의 말을 거스른 적이 없던 딸이 어느 날 새벽에 "내 인생 물어 내라"라는 전화통화로 울먹였으니 부모로서 그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바로 미국으로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 이후 교장 선생님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문제풀이보다는 핵심 역량을 기르기 위해 정성을 쏟고 있다. 독서, 글쓰기, 토론, 예능 교육에 많은 정성을 쏟고 있다. 교육청의 독서, 글쓰기, 책쓰기, 디베이트로 이어지는 교육에 열성적인 후원자이자 지지자의 역할을 하고 계신다.
교장 선생님의 딸은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자신의 계획 하에 공부하기보다는 엄마가 짜 놓은 일정에 따라 열심히 해왔다. 점수는 좀 잘 받았겠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말을 잘 들을 줄도, 자신의 생각을 쓸 줄도, 발표할 줄도 모른 벙어리 학생이 된 것이다. 공부의 본질은 문제풀이가 아니다. 비판적으로 듣고, 읽고, 쓰고, 발표하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이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물론 시대에 따라 권도(權道)가 필요하다. 권도(權道)는 상황에 따라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상황적인 도(道)이다. 예를 들어 평소에 형수의 손목을 잡지 않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그러나 형수가 물에 떠내려가고 있다면 형수의 손목을 잡아서라도 건져내야 한다. 그래서 형수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권도(權道)이다. 남녀유별(男女有別)이라는 정도(正道)를 지키기 위해 형수를 죽게 버려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권도(權道)가 정도(正道)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공부는 문제풀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읽고, 쓰고, 듣고, 발표하는 것으로 한다. 독일의 경우 미술 시간의 절반을 비평문 쓰기에 투자한다. 대학 진학을 위해서 일정 부분 주입식 문제풀이 교육이라는 권도(權道)가 필요하다. 그것이 현실적 요구이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정도(正道)가 되어서는 안 된다. 초'중'고 학생의 공부를 권도로 흐르게 했던 대학입시가 변화하고 있다. 서울대학교가 현재 고등학교 2학년부터 대학입시에서 80%를 수시로 뽑겠다고 한다. 그러면 학교생활기록부와, 추천서, 자기소개서, 면접 등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것이다. 이제 권도에서 벗어나 정도를 찾아야 한다. 공부에서는 잡은 형수의 손목을 이제 놓을 때가 된 것 같다.
한원경 대구시교육청 교육과정운영과 장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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