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정든 고향을 떠났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너무 싫어서였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취직한 곳은 서울 방배동에서 있던 가방 제조회사. 하지만 말이 공장이지 가내수공업 수준이었다. 직원이라 해봐야 6명뿐이었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으로 받은 월급도 단돈 7천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한눈 팔지않고 열심히 일만 배웠고, 가방과 인연을 맺은 지 30여 년 만에 국내에서 손꼽히는 핸드백'지갑 회사를 만들었다. 전국 유명 유통매장 45곳에 입점해 있는 ㈜니콜 밀러의 사영일(54) 대표의 이야기다.
"제가 8남매의 다섯째입니다. 형편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부에는 원래 뜻이 없었어요. 그래도 돌아가신 선친께서는 약주 한잔 뒤에 늘 '공부를 끝까지 못 시켜 줘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도리어 죄송할 따름이었죠."
그는 처음에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사장이었던 고향 선배는 그의 '경영 자질'을 단박에 알아봤다. 이내 남대문시장에 있던 매장으로 보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남대문시장은 전국 최고의 상권을 이루고 있었고, 그는 남다른 판단력과 순발력으로 매출을 확 끌어올렸다.
"1년 반쯤 지나니까 돈 버는 길이 보였습니다. 저축해둔 돈에다가 은행 대출까지 받아서 500만원으로 제 장사를 시작했는데 채 서른이 되기 전에 3억원을 주고 집을 마련할 정도로 성공했어요. 대학을 나온 친구들은 1천만원짜리 전세에 살 때라서 부러움을 많이 샀지요."
종잣돈을 마련한 그는 1984년 직접 공장을 차리면서 본격적으로 기업을 키웠다. 핸드백 가격의 40%를 차지하는 가죽도 고향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외상으로 받아올 수 있었다. 물론 신용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질 좋은 가죽 가방을 저렴한 가격에 팔다 보니 대구 서문시장, 부산 국제시장, 광주 충장로 등 전국 가방 유통시장에 그의 제품이 쫙 깔렸다. 외환위기 때는 당시 연매출의 25% 정도나 되던 큰돈을 떼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공격적으로 나섰다.
"역발상이었죠. 부도난 대형 핸드백 메이커의 가죽을 있는 돈 없는 돈 다 그러모아 몽땅 사들였습니다. 이후 품질에 더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현찰만 받고 팔 수 있게 됐고, 매출도 100억원대를 훌쩍 넘게 됐습니다. 경쟁업체들의 부도를 보면서 한우물만 파야겠다는 생각이 더 굳어졌고요."
중소기업 대표다운 고민도 많았다. 일자리는 없다면서도 기술은 배우려하지 않는 세태에 대한 불만이었다. "기술인력 양성이 이뤄지지 않아 국내 중소제조업체들은 한계를 맞고 있습니다. 공장에서는 40대가 제일 젊은 축일 정도입니다. 저희도 어떻게든 국내 생산을 고집하고 싶지만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핸드백만 바라보고 살아온 덕분에 가끔 오해를 사기도 한다. 사람을 만나면 가방부터 쳐다보는 습관 때문이다. 우연히 '니콜 밀러' 제품을 든 이를 보면 친구를 만난 듯 반갑고,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보면 회사 디자이너에게 바로 귀띔해주기도 한다.
"핸드백에 쓰이는 가죽 종류가 100가지도 넘는 걸 아세요? 장어 가죽은 행운을 불러준다고 하고, 가오리 가죽은 소가죽보다 더 질겨요. 소재, 색상 등 유행을 앞서간다는 것도 참 힘든 일이죠. 하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자부심은 큽니다."
요즘 중국 시장 개척에 대한 꿈에 부풀어있다는 그는 의성 구천면에서 태어나 구천초교와 안계중'고를 졸업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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