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청도 며느리

청도에 다녀왔습니다. 겨울 산행 혹은 드라이브를 위해서가 아니라 시댁 어른들을 찾아뵙기 위해서였습니다. 결혼 전 청도는 드라이브 코스 혹은 갤러리, 작가 작업실을 찾기 위해 들르는 곳이었는데 이제는 시댁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시댁은 팔조령을 지나 차로 30분을 달리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길이 좋아져서 그렇지만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산을 굽이굽이 넘어야 들어갈 수 있는 산골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결혼 후 인사차 들렀을 때 이웃 할머니께 제일 먼저 들은 말이 "우째 이런 골짜기로 시집 왔노?"였으니까요.

시댁은 일찌감치 현대식으로 집을 다시 지었지만 그 살림살이는 도시의 가정집과는 많이 다릅니다. 마당 안쪽에는 정미기, 경운기가 놓여있고 소죽을 끓이기 위한 커다란 가마솥도 걸려 있습니다. 평소에는 어른 두 분만 계시지만 명절 때는 작은 아버님, 고모님 가족까지 수십 명이 모여 숙식을 함께하기에 이불과 그릇이 이불장, 찬장마다 가득합니다.

한겨울 농촌 풍경은 한가롭기 그지없습니다. 집 앞 논밭에는 미처 거두지 못한 볏짚만 몇 뭉치씩 놓여 있을 뿐 앙상한 감나무 가지만큼이나 휑합니다. 몇 주 전 가을걷이가 한창일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입니다. 마당에 높이 쌓여있던 콩 줄기도 싹 걷히고 없습니다. 대신 거실 한쪽에는 메주가 주렁주렁 매달려있고 부엌에는 김치 통이 가득합니다.

이번 시댁행의 명목이 '김장 거드는 것'이었는데 어머니가 일찌감치 담가놓으셨습니다. 제각각 맞벌이로 바쁜 자식들을 배려해서 입니다. 죄송스러운 마음도 잠시, 얼른 김치 한 포기를 꺼내 쭉쭉 찢어 맛을 봅니다. "우와, 역시 이 맛이에요. 어머니." 어머니 김치 맛은 동네에서도 맛이 좋기로 소문나 있습니다. 장맛은 더 일품입니다. 자식들뿐만 아니라 서울과 울산, 부산 등에 떨어져 사시는 친척들도 어머니 장을 꼭 챙겨 얻어 가십니다. 일생을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살아오신 어머니는 해마다 당신 자식 넷에 여섯 동생들 몫까지 넉넉히 장을 담그십니다.

힘든 가을걷이를 끝낸 직후이니 만큼 편히 쉬시라 해도 금세 다른 일거리를 찾아 하십니다. 엊그제는 근처 절에 가서 김장 품앗이를 하고 오셨다고 합니다. 평생 호사스러운 휴식 한 번 가져보지 못한 어른입니다. 따뜻한 아랫목을 파고들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즈음, 앞집 할머니가 건너오십니다. "아이고, 손부 왔나. 애들 델꼬 고생 많제?" 촌수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일가라는 이유로 할머니는 저를 '손부'라고 부르십니다.

지금은 이렇게 시골의 생활 주기를 담담하게 이야기하게 됐지만 그 과정은 참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결혼해서 주말마다 남편과 달콤한 여가시간을 보내겠다는 단꿈은 신혼 때부터 일찌감치 깨졌습니다. 사시사철 크고 작은 일거리들이 많은 시골이니, 주말마다 청도로 달려가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농사일이 없을 때도 시골의 가족 문화는 식사만 간단하게 하고 헤어지는 도시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더불어 자고 살을 부대끼며 몇 끼는 함께해야 제대로 다녀가는 것입니다.

일요일 저녁 집으로 돌아오면 밀린 집안일과 피로감으로 부부싸움을 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청담동 며느리'의 삶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그냥 일반 도시 며느리처럼 살고 싶어"라고 외친 적도 많았습니다. 직장 일이 소위 '청담동 며느리'들이 좋아하는 문화생활과 가까이 있는 것이니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다 아이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물론 시어른들과 함께한 세월이 길어지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집에 가라'는 말씀 한 번 없으셨던 어른들도 '피곤하니 일찍 가서 쉬어라'하시고 저도 요즘에는 진심으로 '괜찮다'하고 더 머물러 있다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림책과는 달리 부리부리하게 큰 눈과 길게 뺀 혀가 무섭다며 소를 싫어하던 딸아이도 요샌 소죽 줄 때가 되면 번개같이 할머니를 따라 우사로 들어갑니다. 어머니 장 담그는 비법을 전수 받아서 노후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됐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트렁크 안에는 쌀, 무, 콩, 배추, 호박, 된장, 간장이 가득 들어앉아 있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저런 곡식과 반찬들을 자식 수만큼 봉지에 나눠 담아 주셨습니다. 철없이 이런 것들을 귀찮아했을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 넉넉한 마음까지 함께 받아 가져갑니다. 언젠가는 저도 어머니처럼 손수 담근 장과 김치, 반찬들을 봉지 봉지에 담아두고 자식들을 기다리게 되겠지요. 어머니와 같은 청도 며느리니까요.

임언미/대구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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