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 通] 국내 최고 茶 권위자 용운 스님

초의선사 5대 법손…'왜 사냐' 화두로 시작, 차문화 전파 평생 용맹

초의선사의 차문화를 전파하는 용운 스님. 수많은 다기 뒤 그의 모습에서 깊이가 느껴진다.
초의선사의 차문화를 전파하는 용운 스님. 수많은 다기 뒤 그의 모습에서 깊이가 느껴진다.
올해 대구에서 첫 강의에 나선 용운 스님. 수많은 수강생들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꽃은 침묵으로 향기를 전파한다.' 꽃과 같은 삶을 살라고 권하는 용운 스님.
올해 대구에서 첫 강의에 나선 용운 스님. 수많은 수강생들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마음의 미동을 2시간 동안 찾지 못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인터뷰 동안 사진기자가 다기가 가득 찬 소형 가구를 옮기는데도 대화에만 집중했다. 불가에 몸을 담고 있는 터라 언론 인터뷰에 익숙하지도 않을 텐데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도 이를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사진기자가 없는 듯 대화가 끊기지 않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의 요지를 정확하게 전달했다. 이런 것이 40년 수도의 내공인가?

용운 스님은 올해가 출가한 지 40년째다. 평범한 대한민국 청년이었다. 하지만 월남전에 참전해 2년여 동안 17차례나 죽을 위기를 모면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가는 이들을 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사색을 했다. 그리고 귀국한 뒤, 3년 동안 구도자로서 세상을 헤매다 불가에 귀의했다. 그곳이 바로 전남 해남 땅끝마을 인근 두륜산 대흥사였다. 8년 동안 수행했다. 화두는 '넌 왜 사냐?'. 찾고 또 찾았다. 벌써 죽었을 수도 있는 목숨인데 불가에 귀의해 스님이 되어 사는 의미를 찾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단순하면서도 삶을 관통하는 화두에 골몰하고 있는 그에게 초의선사가 마음에 들어앉았다. 그리고 초의선사가 전한 다도에 관한 정수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도자이자 구도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초의선사 탄생지 복원에도 온 마음을 쏟고 있다.

'넌 왜 사냐'는 화두로 정진수행한 용운 스님과 필적해(?) 뭔가를 얻어내려 기자가 그의 삶과 철학, 초의선사 탄생지 복원의 의미 등에 대해 파고들었다. 물론 용운 스님이 보기에는 '멀어도 한참 멀었겠지만….' 쉽지 않은 인터뷰였다.

◆대구와의 소중한 인연

쉽사리 만나기 어려운 분이다. 언론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다.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농민신문에서 차문화 확산을 위해 한 번 인터뷰한 내용 외에는 찾기도 힘들었다. 세상에 나서는 일은 조심스럽고, 굳이 나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그를 본지에 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대구에서 차문화 전파에 앞장서고 있는 푸른차 문화연구원 오영환 원장 덕분이었다.

오 원장은 초의선사의 가르침을 전하는 용운 스님을 어렵게 대구로 모셨다. 흑룡띠의 해인 올 한 해 동안 한 달에 한 번(매월 셋째 주 목요일) 용운 스님을 초청해 차문화에 대한 강의를 마련한 것. 그래서 오 원장이 인터뷰를 주선하고, 용운 스님이 마음을 열고 인터뷰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19일은 올해 첫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그 첫날, 매일신문과의 첫 인터뷰도 성사된 것이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용운 스님은 차문화에 관심이 많은 수많은 수강생과 대면했다.

"대구로 기차를 타고 오는 길이 쉽지는 않습니다. 광주에서 서대전까지 와서 다시 갈아타고 동대구역에 내려 이곳까지 옵니다. 오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구에서 이런 가르침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인연이며,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용운 스님은 꽃에 관한 철학적인 얘기도 했다. "말없이 침묵으로 은은한 향기를 퍼뜨리는 그런 꽃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삶입니다. 온 산을 향기롭게 만드는 것은 이름없는 꽃의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차

삶을 큰 호흡으로 관조하고, 작은 것 하나하나 숨결을 담아내는 노력은 역시나 용운 스님의 내공을 느끼게 해줬다. 기자의 짧은 생각으로 초의선사 탄생지 복원은 5년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여겼다. 어림짐작으로 물었다, 날아온 대답은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250억원(국비'도비'군비, 시줏돈)을 들여서 현재 14년째 복원 중이며, 앞으로 30년 정도 더 노력하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겠지요? 전남 무안군 삼향면 초의선사 탄생지가 세계적인 차 문화 전파의 메카이자 차를 통한 수양을 하며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역시나 국내 유일의 초의선사 5대 법손(직계 제자)다웠다. 용운 스님은 이미 차에 관한 한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자이자 차문화를 통한 정신 수양을 전파하는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다. 용운 스님은 1970년대 자신이 직접 대흥사 주변에서 생산한 차 두 가마니가 우리나라 차 생산량의 대부분이었던 시절, 차 재배 환경에 적합한 보성'하동'광양 등지에 차나무를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정부를 설득해 차 제조공장 설립요건 완화에도 큰 역할을 했다. 또 1980년대 각종 강연회, 세미나, 학술대회 등을 통해 우리 차의 우수성과 차 문화 정립에 열정을 쏟았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차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건강에 좋은 차를 찾고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차 문화를 배우는 사람입니다. 차를 통해 예의를 배우고, 차 마시는 것 자체를 정서적으로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이 셋째입니다. 첫째, 둘째 단계를 넘어서 자신을 돌아보며, 삶의 가치를 찾아 수행하고, 또 보다 나은 나를 찾기 위한 도구로 차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제 얘기가 아니라 초의선사가 말한 진정한 차 문화도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초의선사가 남긴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 등에서 전해지는 얘기입니다."

◆특이한 스님 이력, 놀라운 지식

용운 스님은 청와대를 제 집처럼 들락날락하고, 언론인들의 마음자세에 대해 좋은 말씀을 전하며, 물리학자처럼 세상 지식도 많이 알고 있었다. 법문을 통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들을 알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의 이력을 자세히 보면 짐작은 할 수 있다.

그는 2010년 청와대 사랑채에서 매주 1회 제자들을 이끌고 청와대를 찾아온 외국인들에게 초의선사의 차 문화에 대해 알려주고, 정성스레 만든 차 한두 잔을 대접하는 일을 했다. 가르침의 핵심 요지는 이렇다. '차로서 몸가짐을 바로 하고 선(禪)으로서 마음가짐을 다스려 심신이 온전해지면 참사람(眞人)이 된다.'

인터뷰에 관해 이런 우스갯소리도 했다. "부족한 제가 매일신문에 등장하면 제 사진이 나온 신문이 수많은 곳에 배달될 텐데, 제 얼굴이 나온 신문이 때론 물건 쌀 때 구겨지고, 쓰레기통에 버려져 짓밟히고, 물기 제거를 위해 바닥에 깔리기도 할 텐데 별로 좋지는 않죠. 하지만 성철 스님도 이렇게 신문에 등장해 구겨지고 짓밟혀 유명해졌으니, 저도 유명해지려면 조금은 구겨지고 짓밟혀야 되겠죠." 이 농담이 선문답처럼 들렸다.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또 우주관, 세계관, 인간관 이 세 가지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하면서, 놀라운 단어를 끄집어냈다. 신의 입자로 불리는 힉스 입자의 존재에 관한 것. 그는 "힉스는 기본입자들과 상호작용해 질량을 부여하는 가설적인 입자로, 모든 물질의 중량과 질량에 관한 비밀을 풀어줄 것"이라며 "인간이 살아가며 생기는 수많은 일들도 이 힉스 입자처럼 그 원인이 되는 일들과 우주 전체에서 가지는 생존 및 생명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과학자와 구도자 사이를 오가는 말씀을 전했다. 기자도 힉스 입자에 관해 잘 몰랐던 터라 더 이상 질문을 하기는 힘들었다.

"만 70세가 되는 해인 2017년에는 종신수행에 들어갑니다. 세상에 이로운 일들을 하고 있는 지금이 행복하고, 하루하루 에너지가 넘칩니다. 제 법명이 용운(龍雲'용이 구름 위로 승천한다는 뜻)입니다. 올해 흑룡띠 맞죠?"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우태욱기자 woo@msnet.co.kr

※석용운 스님=1947년생. 월남전 참전용사 및 국가유공자. 1972년 대한불교 조계종 대흥사 출가. 1980년 일지암 복원, 1980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강사, 1981년 한국언론연구원 강사, 1989년 월간 다담 발행인, 국제차문화교류협회 회장, 1990년 초의문화재단 이사장, 1998년부터 현재까지 초의선사 탄생지 복원사업 추진. 저서 8권:초의선사 및 차문화 관련, 논문 다수:한국차의 전래에 대한 고찰, 초의선사의 제다법 고찰 등.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조선 후기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했다. '다성'(茶聖)이라 불린다. 다산 정약용, 소치 허련, 그리고 평생의 친구인 추사 김정희 등과 폭넓은 교류를 가졌다. 초의선사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으로 집약된다. 특히, 그의 다선일미 사상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는 것이다. 즉, 차(茶) 안에 부처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것이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대흥사의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40여 년 동안 홀로 지관(止觀)에 전념하면서 불이선(不二禪)의 오묘한 진리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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