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꾼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기업가도 역시 부지런해야 하죠."
부호체어원㈜은 '의자'에 기술력을 집약한 회사다. 이곳 김노수(62) 대표는 농사에서 배운 부지런함, 시련에서 찾은 기회로 회사를 정상까지 끌어올린 경영자다.
◆농사꾼이 사업가로
김노수 대표는 청년 시절을 농사꾼으로 보냈다. 김 대표는 "지역에서 농협 이사도 했고 동네 이장도 10여 년 지냈다"며 "그때만 해도 내가 사업가가 될지 몰랐다"고 말했다. 농사꾼인 김 대표가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90년대 초반 지역 단위 농협조합장 선거에서 실패하고 나서다.
"충격이 나름 컸지, 사람을 만나기 싫을 정도였으니까."
김 대표는 움츠린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낚시에 빠졌다. 그러던 중 지인으로부터 선풍기 제조회사에 납품하는데 투자를 하라고 권했다. 김 대표는 "이렇게 있으면 뭐하나 하는 생각에 당시 2천만원을 투자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투자금이 절반 이상 없어진 것. 그는 "다른 투자자들도 나와 사정이 비슷했다"며 "그런데 직원 한 명이 회사를 소유해 운영만 잘하면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고 알려줬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 말 한마디가 김 대표를 경영자로 탈바꿈시켰다. 다른 투자자에게 손해 본 투자금의 일부를 돌려주고 자신 혼자 회사를 꾸려나가기 시작한 것. 초반 상황은 괜찮았다. 하지만 계절을 타는 제품인 탓에 주문량이 일정하지 않았다. 이후 성서로 공장을 옮긴 뒤 밥솥과 녹즙기 등을 생산하는 A회사에 납품을 했다. 그러나 A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김 대표는 잠시 자신의 일을 접었다. 남의 제품만 만들어주다가는 자신도 부도가 날 것 같다는 판단에서다.
김 대표는 "직원들 인건비를 모두 지급하고 퇴직금도 쥐여준 뒤에 공장을 정리했다"며 "나의 경영이 여기까지인가 보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 경영은 '운명'이었다. 회사를 접고 쉬고 있는 김 대표에게 예전 직원이 찾아와 '의자'를 만들자고 제의했다. 고민 끝에 2억원을 투자했다. 1994년 '부호체어원'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실패 아닌 실패
회사를 만들었지만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잠깐 공장을 운영한 것 외에 제대로 된 회사 경영을 해보지 않았던 김 대표는 자신의 제품을 만들더라도 어떻게 팔아야 할지 막막했다.
"의자를 판매할 곳을 찾기 위해 서울에 사무실을 열고 영업직원을 뽑았었지. 그런데 이들이 나의 뒤통수를 친 거야."
김 대표는 당시 영업직원들이 영업비용과 각종 지원비용을 개인 유흥비로 다 사용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공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장의 기술자들이 재료구입비를 부풀려 자신들의 사익을 챙기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김 대표는 "경영이라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며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내가 더욱 적극적으로 열심히 찾아다니고 확인했다"고 말했다.
투자도 계속됐다. 1996년 말쯤 성서공단 내 3천480㎡(1천60평)의 부지를 구입해 공장을 이전했다. 기계 설비를 3배 이상 늘리고 전국망을 운영했다. 김 대표는 "다시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 이때부터 일주일에 3일은 직접 운전해 서울을 오가며 영업팀을 꾸려나갔다"며 "당시 서울에서 자취하는 막내아들 집에서 지내며 영업과 수금에 몰두했다"고 말했다.
◆어려움이 기회로
직접 발로 뛰며 회사를 키워나가던 중 한국 경제가 침체에 빠진 IMF가 닥쳤다. 모두가 힘든 시기에 김 대표는 오히려 기회를 얻었다. PC방이 전국적으로 유행을 타기 시작한 것.
"PC방에는 컴퓨터만 있는 것이 아니지, 컴퓨터 한 대당 의자가 한 대씩 필요하잖아."
김 대표는 의자 수요 증가에 맞춰 적극적인 영업을 펼쳤다. 덕분에 밤새 공장을 가동할 정도로 수완이 좋아졌다. 심지어 김 대표는 수출에도 눈을 돌렸다. 그는 "IMF 당시 환율이 높아 국내시장보다 수출을 하면 이익이 더 많이 날 것 같았다"며 "무역팀장을 구해 해외 현지에 보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과거 영업사원의 실패가 반복됐다. 현지에 있는 직원들이 개인적 욕심을 채우는데 급급했던 것. 그는 "군대를 제대하고 졸업한 막내아들에게 수출을 맡겼다"며 "아들이 직접 뛰면서 제대로 된 1명의 바이어를 불러들이니 다른 바이어들이 계속해서 늘어났다"고 말했다.
막상 수출 계약을 했지만 납품을 할 때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의자를 실은 컨테이너가 적도를 지나 남반구로 가면서 높은 온도로 인해 모양이 뒤틀렸던 것. 또 러시아로 수출하는 의자는 추운 날씨로 인해 높이 조절용 가스가 얼어 모두 불량이 났다. 하지만 김 대표는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그는 "그만큼 수출을 하려면 높은 기술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그때부터 제품의 연구에 눈을 뜨고 매년 10억원씩 연구비용으로 투자했다"고 말했다.
◆잊을 수 없는 화재
기술력으로 국내 시장은 물론 수출까지 성공의 길을 가는 듯했지만 김 대표에게 가장 큰 시련은 2001년 7월 10일 발생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잠을 자려는데 전화벨이 울린 거야. 그때 느낌이 왠지 이상했지."
김 대표는 수화기 너머로 공장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안고 현장에 도착했지만 이미 공장은 전부 불타버렸다. 피해액만 50억원이 넘었다. 김 대표는 "그때 충격으로 아직도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철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어려움을 하도 많이 겪었기 때문에 극복도 금방했다"며 "아들이 '유산은 필요 없으니 지금까지 일으킨 회사를 접지는 않았으면 한다'는 말에 힘을 내 8일 만에 새공장으로 옮겼다"고 웃음을 보였다.
김 대표는 "지금 우리 공장에는 20대의 CCTV가 설치돼 있어 TV와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든 확인할 수 있다"며 "또 회사는 한 달에 한 번씩 화재 훈련을 빠짐없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의 재앙을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 잃은 만큼 큰 교훈을 얻었다.
끝으로 김 대표는 부호체어원 창업자로서 '의자'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그는 "사람은 하루에 최소 열두 번은 의자에 앉는다고 한다. 그만큼 의자는 편하고 인체공학적이어야 한다"며 "우리는 이러한 의자의 기본을 따르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신의 제품에 대해 '최고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말하는 김 대표의 얼굴은 농사꾼이 아닌 경영인의 모습이 가득했다.
노경석기자 nk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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