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시시한 음식을 먹기에는 삶이 너무 짧다

"삶의 5할은 먹는 즐거움"이라고 폼 나게 얘기하고 그 말을 주절주절 각인시켰지만 30대가 되기 전에 시시한 빵으로 길든 배는 소화불량과 불쾌한 복부만 있을 뿐 '변화가 생긴 증좌'는 어디에도 없었다. 여행지나 혼자 접하는 생소한 끼니는 그저 '때우기'에 불과하고 가끔 '마음의 공터'를 스스로 보기도 했지만 아직은 수상하다. 유난히 숟가락만 들면 급해지고 허겁지겁 해치우는 못된 버릇이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마음을 의탁하는 형이 주선한 저녁자리.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그는 그 어떤 윗사람이 있든, 아내가 있든, 친구가 있든 "자 이것 좀 드세요"라든가 "먼저 먹어 보라"는 형식적인 말 따위는 가당찮은 일, 무조건 남이 먹기 전에 '먼저 확보'해서 게 눈 감추듯 해치워 버려 오해를 산 에피소드에서는 꺽꺽 뒤집어진다. 심지어 친구의 부인이 정성스레 싸주는 도시락까지 서슴없이 먹는 일로 친구를 잃을 뻔한 곡절은 '싸가지 없는 예의인 듯하나 감동적'으로 끝난다. 예의 그 괄괄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궁핍한 과거를 베푸는 실천으로 행하는 까닭이겠거니 생각한다.

"몹시 허기가 몰려 왔지만 때 되면 '먹는' 게 귀찮아 시간은 이미 오후 3시다. 하루 종일 FM 방송의 모든 오프닝 멘트는 단연 눈, 눈발이었다. 폭설은 오전부터 내려 온통 세상을 하얗게 도배했다. 대설주의보를 전하는 목소리는 아슬아슬하다. 어쩌고저쩌고하는 왕년 군대 얘기가 뻔한 것처럼 가끔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디스크자키들의 개성이 딱 증발되는 날은 눈이 난폭하게 내리는 오늘 같은 날이다. 그렇다고 당혹하거나 띄엄띄엄 창문을 열어 바깥 풍경에 탄성을 자아내거나 '도대체 웬 폭설이냐'는 식으로 혼자 중얼거리지도 않았다. 간혹 배에서 나는 꼬르륵꼬르륵하는 소리는 옆집의 개 짖는 요란한 소리에 묻혔다. 갑작스럽게 내린 폭설에 준비해 두지 않은 '시시한 먹거리로 채워야 할 배?'라는 낭패감이 들었지만 까닭 모를 결핍을 탐닉하기는 더없이 좋다. 이 차분해지는 고립의 정체는 또 뭘까? 고립이 내면의 불구를 치유해 줄 것 같은 날이다."

작년 2월 14일 '대설주의보'가 내린 가창, 폭설을 뒤집어쓴 스튜디오(일오처)에서 쓴 일기이다. 한파는 작업실의 물감을 얼게 했고 급기야 물까지 얼게 했다. 지긋지긋한 추위는 잘 끝나지 않았고 그때 일오처는 서늘한 기운이 뒤 목을 쓱 타고 오는 듯한 외딴곳이 되었다. 그나마 오디오의 빨간 전원이 살아 다행이었고, 그 고립을 자처할 수 있는 까닭이었지만 물이 끊겼다는 건 난감했다. 생리적 기제에 따른 배설의 쾌는 종결되고 그로부터 편안함은 불편으로 가중됐지만 대체로 나를 위무한 기억은 음악과 먹는 일로 기억된다. '대설주의보를 기다리며'라는 제목의 앨범을 반복 재생한 것도 "꾸역꾸역 배에 채운 인스턴트 식품"도 사실은 따분한 음식을 먹는 것보다 섬뜩한 음악 듣기가 좋을 때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금껏 배를 채운 건 한 끼의 명상이 배제된 타성이 관성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맛의 무지렁이가 음식을 먹고, 그것의 숙성된 깊이를 느낀다는 게 때로는 '난감함' 정도로 온다. 그러나 변화의 증좌가 태도변화로 선회하기 시작한 동기는 여행, 일테면 호사스런 별식을 찾아 맛의 잣대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맛과 미는 생래적인 동의어일 것이다. 왜 그걸 이제 깨달은 걸까? 삶의 한 축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부려 창작의 자양분을 쌓는 일인데, 어쩌면 그렇게 속을 물렁하게 채워 味(미)의식과 美(미)의식의 불균형을 불러온 것일까? 따지고 보면, 시시한 시간이 너무 없었던 일상이 옹색한 미각만을 키워왔을 게다.

지난겨울 호주의 멜버른에서 중부 아웃 백으로 가는 여행길은 멀고 따분했다. 뜨거운 태양이 날을 세워 호들갑을 떨던 때다. 폭염을 피해 들어간 낡은 카페에서 허기와 더위를 식히며 만난 벽면에는 누군가 서툴게 쓴 캘리그라피(손글씨)가 무릎을 치게 했다. "LIFE'S TOO SHORT FOR BORING FOOD!!" 여행지의 기억할 수 없는 많은 밥도둑들은 분명 호사스런 행복이다. 이제 추위도 폭염도 걷어내며 작업실에서 시간을 축내야 한다. 여행 내내 똬리를 틀고 앉았던 묘한 긴장과 그리고 서럽고 질긴 더운 심장의 원형을 복구하는 일도 '배를 채우는'일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 "시시한 음식 먹기에는 삶도 인생도 짧고 따분한" 것이다.

권기철/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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