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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부] 말의 중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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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우리말에는 남성과 여성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없었다. 현재 보편적으로 쓰고 있는 '그' '그녀'는 고유의 3인칭 대명사가 아니라 '그곳' '그 녀석' 등의 쓰임처럼 지시관형사였다. 20세기 초반 영미 문학을 본격 접하게 되면서 영어의 'he' 'she'에 대해 '궐자'(厥者) '그이'나 '궐녀' '그네' '그미' 등으로 다양하게 대응해 쓰다가 '그' '그녀'로 귀결된 것이다.

'그' '그녀'의 사용이 보편화된 것도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무렵이다. 문학작품뿐 아니라 신문 잡지나 영화 등에서도 그 또는 그녀라는 표현이 대세였다. 하지만 당시 '그녀'라는 표현에 대한 불만이 특히 많았다. 1965년 '현대문학' 3월호에 당시 이를 둘러싼 학자와 문인들의 주장과 반론이 실렸다. 국어학자 최현배는 '그녀'라는 대명사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녀'는 일본에서 만든 조어인 '가노죠'(彼女)를 흉내 냈다는 주장이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영미 문학의 'he'와 'she'라는 말에 대응하는 용어로 '가레'(彼)와 '가노죠'를 만들어 번역해 사용한 것이 계기라는 것이다. 최현배는 여자는 '어미' '할미' 등으로 불리기 때문에 '그미'를 쓰자고 주장했다.

반면 김동리는 '그녀'라는 말을 고집했다. 김동인'양주동 등은 '궐녀'라는 표현을 주로 썼고 해외 문학파는 '그네'를 사용하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하지만 '그네'나 '그미' '궐녀'와 같은 표현은 요즘 독자들에게는 낯설어서인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처럼 남자'여자를 지칭할 때 어떤 말이 더 적합한가를 두고 벌이는 고민도 이제는 부질없는 일이 될 듯 싶다. 남편(husband)과 아내(wife)라는 용어가 곧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고 최근 영국 언론이 보도했다. 영국 정부가 동성 결혼 합법화를 추진하면서 공식 문서에서 남편과 아내라는 용어 대신 중립적인 배우자(spouses)와 파트너(partners)라는 용어를 쓸 방침이라는 것이다. 남녀 구분에 따른 혼동을 피한다는 이유에서다.

남편과 아내라는 용어가 각종 공문서에서 사라질 경우 'he'나 'she'라는 단어도 장차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 궁금해진다. 영국 성공회를 대표하는 로완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동성 결혼 합법화 문제를 둘러싼 논란 끝에 사임하기로 했다는 소식까지 들리는 마당이니 모호해지는 남녀 정체성만큼이나 말의 변화도 새삼스럽다.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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