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주말, 원효대사가 홀연히 대구에 나타났습니다. 요즘 중생들은 도대체 어떤 화두에 매달려 고해(苦海)를 건너고 있는지 살펴 이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는 한편, 이승을 살다간 당신이 이 땅의 후대들에게 깨달음의 법문을 펴고자 1천300여 년 만에 들른 것입니다.
해질 무렵, 구름을 타고 장삼자락을 휘날리며 잔설이 희끗희끗한 팔공산 비로봉에 내려선 대사는 손차양을 하고 한참 동안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보지만 참으로 훌륭한 풍경이야. 옛날부터 산수가 인물을 양육한다고 했거늘, 그렇게 셈해보면 이곳 후손들의 마음 풍경도 고봉준령(高峰峻嶺)의 경지를 넘나들겠지."
서봉 쪽에서 흘러내리는 낙조를 등지고 긴 그림자를 앞세우며 대사는 휘적휘적 능선을 타고 동봉을 지나 병풍바위 길을 내려오다가 염불암 마당에서 한참을 기웃거리며 법당 안에서 들려오는, 맑고 깨끗한 염불 소리에 미소를 짓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절벽을 걸어 전망대식당 마운틴블루로 내려와 동동주 한 사발로 목을 축인 뒤 동화사 뒷등성이 쪽으로 길을 되돌렸습니다.
동화사 대웅전 앞마당에는 땅거미와 산그늘이 짙게 쌓이고 있었습니다. 대사는 석등 곁에 그림자처럼 서서, 법당에서 스님들이 올리는 저녁 예불 모습을 곁눈질로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경내를 빠져나와 백안삼거리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새 어느 눈치 빠른 스님이 암행어사처럼 숨어다니는 원효대사를 알아보고 비상연락망을 신속하게 가동했는지, 아니면 지나가던 바람이 대사의 행방을 문자로 날려 보냈는지, 팔공산 골짜기마다 크고 작은 절에서 저녁 공양을 하다 말고 나온 스님들이 장삼을 차려입고 목탁을 두드리며 대사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그 행렬이 십리도 넘었습니다.
그런데, 시내 쪽으로 가면 갈수록 불을 밝힌 식당이 길가에 즐비하고, 또 식당 앞을 지날 때마다 음식 냄새가 역한지 대사는 연신 코를 막고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봉무동 이시아폴리스의 울긋불긋한 거리를 지나, 불로동 화훼단지를 지나, 아양교를 건너, 동대구역 앞을 지날 무렵, 원효대사는 갑자기 멈춰 서서 시가지 한 곳을 가리키며 뒤따르던 무리들에게 물었습니다.
"대체 저기가 어딘고?"
"예, 인간들의 먹거리를 파는 집들이 모여 있는 거리입니다."
"내 저기를 가볼 것이야. 이상한 기운이 서려 있느니라."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의 불꽃 속에 사람들의 취한 목소리가 왁자지껄한 식당거리로 접어들면서, 대사님은 온 얼굴에다 실룩실룩 내 천자를 그리며 붉으락푸르락 분노의 단풍잎을 마구 찢어 날렸습니다.
지글지글막창, 복돼지삽겹살, 암소머리곰탕, 아나고대가리, 돼지목살, 한우생곱창, 생돼지자갈구이, 등심해장국, 닭똥집, 철판낙지, 봉황찜닭, 통황태탕, 아지매불닭발, 개고기액기스, 유황오리, 꽃게복탕, 논고디탕, 개구리뒷다리볶음, 생미꾸라지탕, 맛나염소수육, 토종흙돼지왕족발, 민물메기매운탕, 대창똥창막창, 진짜원조곰탕, 아구찜, 개고기진국, 정력토룡진탕, 용궁해물, 자라구이, 말고기생회, 꼼장어고추장꾸이, 참숯불꽃등심, 뱀알탕, 꼬물꼬물산낙지, 송아지간회, 꿩고기샤브샤브, 부뚜막오겹살….
"쯧쯧쯧…. 무릇 음식을 먹는 까닭은, 혀끝의 달콤함을 즐기거나 끄윽끄윽 트림을 해대며 포만감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며, 이성의 요상한 눈길을 훔치기 위해 복근을 만들거나 섹시한 에스라인 몸매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며, 오로지 육신을 계속적으로 지탱하며 청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거늘. 이건 뭐 바다 속이고, 땅속이고, 나무 위고, 숲 속이고 할 것 없이, 세상 구석구석을 알뜰히도 뒤져, 온갖 미물까지 송두리째 잡아다가 삶아 먹고, 지져 먹고, 볶아 먹고, 구워 먹고, 회쳐 먹으며 흥청대는구나. 지나치도다. 지나치도다. 어머니인 지구가 굳이 자기들 인간만을 편애할 까닭이 어디에도 없건마는 마치 자기네가 이 땅의 조선시대 왕족인 양 행세하는구나. 그래, 인간들이 저 모양 저 꼴로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때까지 너희들은 절간에 들어앉아 염불이나 외고 있었단 말이지. 도대체 너희들의 소임이 무엇이었더냐?"
코를 감싸 쥐고 식당 거리 중간에서 빠져나와 수성못둑으로 오른 원효대사는 마구 화를 내며 고개를 꺾고 따라오는 스님들에게 불벼락을 내렸습니다.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꿇어앉아 용서를 비는 스님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이마에 차례대로 꿀밤을 먹이며, 지금 당장 오관게(五觀偈)를 삼천만 번씩 소리 높여 외고 그 참뜻을 인간들에게 전할 방안을 A4 열 장에 세세하게 적어 내일 해뜨기 전까지 제출하라며 호통을 쳤습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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