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봄을 찾아 헤매었지만 찾지 못했네(終日尋春不見春)
지팡이 짚고 산 넘고 물 건너 몇 겹을 다녔던가(杖藜踏破幾重雲)
돌아와 매화나무가지 끝을 보니(歸來試把梅梢看)
봄은 이미 가지 끝에 성큼 와 있었네(春在枝頭已十分)
중국 송나라 시인 대익(戴益'생몰 연대 불상)이 봄을 노래한 '탐춘'(探春)이란 시다. 황악산에도 봄이 성큼 다가왔다. 언제쯤 마른 가지에 새잎이 나오고 꽃망울을 터뜨릴까를 목을 내어 기다렸는데 한 찰나에 봄이 자태를 드러냈다. 올해는 예사롭지 않은 봄 날씨로 매화'산수유'진달래'벚꽃 등 봄꽃이 동시에 피었다. 예년에는 차례로 꽃을 피우고 줄지어 꽃잎이 지더니만 괴팍한 봄 날씨에 꽃들도 장단을 맞춰 춤을 주는가 보다. 꽃들이 미쳤다!
◆스님들의 애환과 추억을 간직한 감나무
황악산 직지사 경내 나무에도 꽃이 피고 새 잎이 돋았다. 직지사에는 유난히 감나무가 많다. 종무소 앞마당과 성보박물관인 청풍료 굴뚝 옆, 설법전 앞 등에는 수령을 짐작하기 어려운 큰 감나무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가을이면 수백 년 된 아름드리 감나무에 홍시가 달린다. 이는 직지사만이 연출하는 또 다른 볼거리이자 매력이다.
언제부터 감나무가 있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조선 초부터 직지사에서 생산된 감을 나라에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명당이 서른 살쯤에 직지사 주지로 임명된 뒤 지은 '귀향'(歸鄕)이라는 시(詩)에 직지사로 들어오는 시교(枾橋'감나무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는 구절로 미루어 감나무가 많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직지사는 감나무로 인해 조선 왕실과 대립, 일촉즉발의 위기상황까지 가는 아찔한 얘기가 전한다.
직지사에서 궁궐에 감을 진상하는 '직지사반시진상법'이 시행된 것은 조선 7대 임금인 세조 때다. 당시 해인사 주지로 있던 학조(學祖)대사가 직지사 주지를 겸하고 있었다. 학조는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부터 친분이 두터워 왕이 되자 감을 진상하기 시작했다.
이때 시작된 감 진상은 세조가 승하하고 세월이 흘러 연산군 때까지 이어졌다. 나이가 들어 기력이 약해진 학조는 매년 감을 따서 서울까지 오가는 것이 힘들어졌다. 이에 진상을 위해 내왕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적은 상소를 올렸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궁궐에서 직접 관리를 보내 감을 따 가져갈 것을 요구했다.
상소를 본 연산군은 크게 화를 내며 학조를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옆에 있던 왕비 신 씨가 "세조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던 고승에게 위해를 가함은 옳지 않다"고 설득한 뒤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며 며칠간의 말미를 얻었다. 이후 왕비 신 씨는 편지 한 장으로서 학조의 뜻을 거두게 했다. 편지 원문은 오래도록 절에 보관돼 오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고 전한다.
왕비 신 씨의 편지 내용은 구전(口傳)으로 전해진다.
"해마다 감을 따 머나먼 서울까지 보내는 스님의 노고야 짐작을 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스님이 요청하신 대로 궁궐에서 사람을 내려 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혹여 김천 땅까지 내려간 관리가 감나무의 해거리를 감안하지 않고 풍년이 들었던 해의 양만큼 채워야 한다면 오히려 직지사에 해악이 될까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선대왕 때부터 맺어진 인정으로 받을 것이니 힘드시더라도 사찰의 형편대로 매년 조금씩 올려 보내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실제로 직지사 감나무는 해거리가 심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왕비 신 씨는 감나무의 해거리까지 염두에 두고 합리적으로 학조를 설득했다. 기지에 찬 왕비의 편지 한 장으로 자칫 큰 화로 이어질 뻔한 '감나무 사건'이 무탈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연산군은 폭군으로 치부하면서도 왕비 신 씨에 대해선 인자하고 현명한 국모로 기억하는 그 언저리에 직지사 감나무와 얽힌 일화가 있다.
먹거리가 부족했던 1960, 70년대에 직지사 감나무 홍시는 스님들과 동네 아이들에게 좋은 간식이었다. 직지사 흥선 스님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절 마당을 쓸 때 떨어진 홍시를 주워 모래를 털고 먹던 기억이 새롭다"며 "조금만 늦게 나오면 동네 개구쟁이들이 모두 주워가고 없어 홍시를 두고 보이지 않는 경쟁을 했다"고 추억담을 말했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스님 이를 뽑은 사연
조선 후기 방랑시인으로 알려진 김삿갓(본명 김병연'金炳淵)은 직지사를 다녀갔다. 시인 김삿갓은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를 욕보였다는 자책으로 세상을 등지고 유랑의 삶을 살다 갔다. 당시는 세도정치의 여파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안동 권씨들이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했던가. 직지사에 들른 김삿갓의 눈에는 절과 스님도 부패한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무위도식하며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는 직지사를 찾았다가 스님들에게 문전박대를 당했다. 이때 쓴 시가 '직지발치승'(直指拔齒僧)이다. 김삿갓은 주지 스님과 글짓기 내기를 했다. 이기는 사람이 지는 사람의 생니를 뽑자고 제안했다. 행색이 초라한 걸인이었던 김삿갓을 만만하게 본 스님이 이에 응해 결국 이가 뽑혔다고 전해지는 시가 바로 '직지발치승'이다.
금오라 했는데 눈이 쌓여 까마귀 머리가 희구나(金烏雪積烏頭白)
황악이라 했는데 꽃이 피어 학의 머리가 붉구나(黃岳花開鶴頭紅)
추풍령이라 했는데 봄꽃이 피어 괴이하구나(秋風嶺上春花怪)
직지라 했는데 꼬부랑길이 웬 말이냐(直指由中路曲何)
직지사에서 바라보이는 금오산, 황악산, 추풍령의 지명을 계절과 절묘하게 연결해 풍자했다. 결정적으로 마지막 행에 곧을 직(直)자가 들어간 직지사를 굽은 길로 표현하며 절의 행패를 비꼬았다. 이처럼 김삿갓은 혼란한 세상을 유람하며 권력가를 풍자하는 시문을 무수히 남겼다. 특히 스님을 골탕먹인 시가 자주 등장한다.
◆일엽 스님과 일당 스님의 발자취
직지사에는 비구니 일엽 스님의 아들인 일당(김태신'金泰伸'1922~) 스님의 애절한 사모곡(思母曲)이 전한다. 나해석, 윤심덕과 함께 조선 신여성(新女性)으로 잘 알려진 일엽은 예산 수덕사 만공 스님의 제자로 불문에 귀의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곳 직지사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일엽은 일본 명문가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아들까지 낳았지만 시부모의 반대로 결혼을 하지 못했다. 일엽은 조국으로 돌아와 사랑과 관련된 여러 행적을 보이다 30대 초반에 직지사를 찾았다. 일엽은 이곳에서 탄옹 스님의 인도로 머리를 깎고 출가한 뒤 탄옹의 추천으로 만공 스님의 제자로 들어갔다. 일엽은 이후에도 직지사에 머물며 수행을 했다고 한다.
아들인 일당은 일엽이 직지사 서전(西殿)에서 정진할 때 무작정 이곳을 찾았다. 그때 중암의 관응 스님과 조우하게 됐다. 나중에 일당이 출가할 때 스승의 인연으로 다시 만났다. 일당은 일엽을 찾아 수덕사로 갔다. 일엽은 "나를 어머니로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고 해라"고 말했고 일당은 크게 낙담했다. 그 뒤 어머니 일엽에 대한 그리움을 품은 채 평생을 살았다.
일당은 나이 일흔이 다 되어 어머니처럼 불문에 귀의했다. 직지사에서 수계식을 가지려고 했지만 관응이 뉴욕 원각사에 머물고 있어 그곳에서 머리를 깎았다. 이후 직지사 중암에 머물며 화실을 마련하고 십수 년 그림을 그리며 수행했다. 3년 전 중암을 떠나 지금은 일본에 머물고 있다. 일당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자전적 소설 '라훌라(부처님이 속가에 두었던 친아들 이름)의 사모곡'에 잘 나타나 있다.
일당을 옆에서 지켜본 중암의 도진 스님은 "평생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사셨던 분"이라며 "일본인과 한국인 부모 사이에 태어나 화가로서 명성을 쌓았지만 경계인(境界人)의 운명으로 불가에 귀의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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