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남희의 즐거운 책 읽기] 향랑, 산유화로 지다/정창권/풀빛

열녀 향랑 자살사건으로 본 조선 민중 생활사

구미 금오산 아래 낙동강 옆 한 마을에 사는 소녀가 나무를 하다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흑흑 흐느끼며 강가를 따라 걸어오는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는 소녀를 붙들고 자신의 기구한 사연을 이야기한 뒤 노래 한 곡을 지어 부르고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노래는 다음과 같았다.

"하늘은 어이하여 높고도 멀며/ 땅은 어이하여 넓고도 아득한가./ 천지가 비록 크다 하나/ 이 한 몸 의탁할 곳이 없구나./ 차라리 이 강물에 빠져/ 물고기 배에 장사 지내리."

이 노래의 제목은 '산유화'(山有花)로, 조구상의 '열녀향랑도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본래 '산유화'는 백제시대 부여지방의 민요로, 백제 망국의 한을 노래한 것이었다. '산유화'라는 제목의 노래는 모두 애상적인 곡조로 한결같이 처량한 내용을 담고 있다. 향랑은 이 민요에 오갈 데 없는 자신의 비극적 처지를 담은 가사를 얹어 노래하였던 것이다.

향랑이라는 여인의 자살사건을 소재로 하여 17세기 조선의 가족사를 분석한 정창권의 '향랑, 산유화로 지다'를 읽었다.

향랑은 선산부 남쪽 40리에 위치한 상형곡, 오늘날로 본다면 구미시 형곡동에 살았던 여인이다. 향랑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새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안타깝게도 새어머니는 어린 향랑에게 좋은 어머니가 되지 못했고, 향랑은 새어머니의 박대 속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향랑은 열일곱 살에 같은 동네에 사는 열네 살의 임칠봉과 혼인을 하였다. 그러나 남편과도 사이가 좋지 못하여 남편은 아내 보기를 원수 보듯 하였다. 향랑은 하는 수 없이 숙부에게 몸을 의탁했는데, 숙부도 그녀를 개가시키려 하였다. 이에 다시 시댁으로 돌아가니 시아버지 또한 다른 곳으로 개가하라고 하였다. 갈 곳 없이 된 향랑은 마침내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나무꾼 소녀에게 이야기의 전말을 전해들은 부사 조구상은 향랑의 죽음을 삼강행실의 예에 의거하여 그 형체를 그림으로 그리고 사실을 기록하여, 뒷날 보는 이로 하여금 향랑이 있었고 그 죽음이 열(烈)이었음을 알게 하고자 '열녀향랑도기'를 남기게 된다. 그것은 원치 않는 혼인을 하고 불행한 삶을 살다 갈 곳 없이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향랑의 삶과 죽음과는 정작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16세기인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는 고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여권 존중의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 사람들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서 혼례를 올리고 그대로 눌러 사는 장가와 처가살이 혹은 남귀여가(男歸女家)와 친정생활을 하였다. 곧 딸과 사위가 친정 부모를 모시고 사는 시대였다. 그들은 보통 자녀들이 다 클 때까지 친정에서 살다가 느지막이 시댁으로 가곤 하였다. 그리하여 가족관계에서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았고, 친족관계에서 본손과 외손을 구별하지 않았다고 한다.

17세기는 한국 가족사에서 하나의 커다란 변혁기였다. 한국 가족사는 17세기를 기점으로 이전과 크게 달라졌으며, 그와 함께 한국 여성사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암흑기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 무렵부터 가장권이 강화되면서 남존여비 의식이 팽배해지고, 여성의 이혼과 재혼이 금기시되는 등 완고한 가부장제가 정착하였다.

향랑이 나고 자란 선산은 '절의의 고장'이라 일컫던 곳으로, 일반 백성은 물론 짐승들까지도 절개를 지킬 줄 안다고 자부하는, 다른 지역에 비해 유교적 성향이 매우 강한 지역이었다.

향랑은 17세기 중반의 장화, 홍련과 함께 이처럼 완고한 가부장제 초창기의 매우 비극적인 희생자였다. 이 사건에는 어린 시절의 계모 문제, 결혼 후의 가정폭력'이혼'재혼 문제 등 가족 내의 갈등적 측면이 종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지금까지 향랑 사건은 열녀담, 곧 서민층 열녀담의 하나로만 주목되어 왔으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생생한 서민층 가족의 생활문화를 발견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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