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나는 꿈이 있습니다

괴물은 문득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길러진단다. 인종 간의 증오심도 애초부터 타고난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환경의 결과일 때가 더 많다고. 무엇이든 반복해서 몸으로 익숙해지다 보면, 어느새 제 마음이 원래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 없이 살다 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하지만, 그 생각조차 누구의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는 왈칵 끔찍해진다.

'미시시피 버닝'(Mississippi Burning, 1988)은 1964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 주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흑인들의 선거참정권 활동을 벌이던 세 명의 민권운동가 실종 사건을 다룬 이야기다. 따로 구분된 백인과 유색인 전용의 식수대를 느릿하게 보여주면서 시작된 영화는, 마침내 불타버린 교회 자리에서 백인과 흑인들이 함께 어울려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그 우울한 시작과 희망찬 마무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아수라장과 이어지는 단말마 비명의 지옥도이다. 미국 민주주의 고귀함과 순결함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는, 백인 우월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KKK단(Ku Klux Klan, 미국의 극우 비밀결사단체) 광풍 앞에서 숨죽인 마을의 평화. 단지 살아남기 위한 침묵들을 잘 살아가고 있는 평온으로 우기며, 도리어 자랑스럽게 떠벌리며 기고만장이다. 신에게조차 버림받은 짐승들에게 선거참정권을 빌미로 자유와 평등이라는 사탕발림으로 부추기는 족속들은 하나같이 사악한 빨갱이일 뿐이다. 이 완강한 벽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수사관들에게 구원의 틈새를 보여준 어느 범행 공모자의 부인. 고결한 인간성 수호를 앞세운 무리들의 비인간적인 폭력과 야만 앞에서 괴로워하던 한 여인의 고백으로 우여곡절 끝에 사건의 전모가 속속들이 밝혀진다. 힘들게 되찾은 평온을 뒤로하고서 수사관들은 떠나고, 아직은 불안한 화음의 합창이 울려 퍼진다. 깨어진 비석에 아로새겨진 '잊지 말자, 1964년'이라는 문구를 재삼 상기시키면서.

"나는 언젠가는 피에 물든 조지아의 언덕에서 옛적 노예의 아들과 옛적 노예 소유주의 아들들이 형제애에 넘치는 밥상에 함께 앉을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억압과 불의의 열기로 시달리고 있는 미시시피 주마저도 정의와 자유의 오아시스로 변모할 것이라는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네 명의 어린 자녀들이 그들의 피부 색깔에 의해 판단 받지 않고, 그들의 인격에 따라 판단 받을 나라에 살게 될 것이라는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한 해 전인 1963년 워싱턴,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역사적인 평화대행진에서 행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이다. 그 절절한 꿈이 이미 먼바다 건너의 과거완료형인지, 아직 이 땅의 현재진행형인지는 우선 스스로와 주변부터 돌아볼 일이다.

송 광 익(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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