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첫정은 어찌나 지독한지. 이혼녀가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다가 말기암이 찾아오면, 이상하게도 전(前) 남편과 함께 우리 병동을 찾아온다. 남편이 재혼했나 안 했나는 상관없다. 참을 수 없는 극심한 통증으로 시달리면 수십 년을 남남으로 살았던 바로 그가 생각나는가 보다.
영호 엄마가 그랬다. 군대를 막 제대한 듯한 짧은 머리의 영호가 엄마의 통증 때문에 상담을 하러 왔다. 엄마가 위암 말기란다. 그녀는 평소에도 미련할 만큼 참을성이 많았고, 무엇보다 돈이 아까워 입원하는 것을 꺼렸다.
영호는 서글서글하고 깔끔하게 생긴 법대생이었다. 외관상은 그렇게 없어 보이지도 않았다. '형제도 없이 영호만 키우는데 그렇게 아낄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에 필요 이상으로 꼬치꼬치 캐물었다. 다행히도 인상 좋은 그는 기분 나쁘지 않게 가족사를 털어놓았다. 영호가 여섯 살 때 부모는 이혼했다. 그때부터 엄마와 단둘이 살았다. 외삼촌이 있지만 도울 형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옷 장사를 했다. 살기도 빠듯한데 아들을 대학까지 보내려니 생활은 쪼들렸다. 그런 와중에 집도 한 칸 장만했다. 그녀의 속옷은 늘 영호 것을 꿰맨 것이었다. 아빠는 일 년에 한 번쯤 보는데, 이미 재혼을 했다.
통증이 있으면 입원이 아닌 외래로 한 번 오시라고 하면서 적절한 진통제를 처방해주었다. 그가 다녀간 보름쯤 지난 일요일 저녁에 응급실로 그녀가 왔다. 많이 아팠다. 당직의 말로는 보호자 남편이 같이 왔다고 했다. '그녀는 남편이 없는데, 영호가 남편으로 보일 만큼 나이 들어 보이지는 않을 텐데'라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월요일 출근해보니 남편이 있었다. 전(前) 남편이었다. 어젯밤 뜬금없이 이십 년 만에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다행히 적절한 진통제를 사용해서 통증은 말끔히 사라졌다. 그래도 그는 계속 그녀 주위를 배회했다. 병실에서는 이혼한 남편이라고 말하는 것이 불편했는지 그들은 부부처럼 지냈다. 가물치도 고아서 약으로 만들어 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가 없어졌다. 병실의 다른 보호자 말로는 한 번 심하게 싸웠단다. '싸울 일이 따로 있지. 말기암 환자와 다투어서 삐치다니. 영호를 키우면서 양육비도 안 줬으면서. 그럴 거면서 가물치는 왜 해 왔을까? 그거 해오지 말고 마지막에 좀 참지.'
그렇지만 영호 엄마는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그저 영호만 있으면 좋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그녀에게도 임종이 다가왔다. 그가 왔다. 이제는 의식이 없는 그녀의 손도 잡아주고 영호가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그 옆을 지켰다. 가슴에 남긴 사랑의 발자국은 죽기 직전에도 지워지지 않는가보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랑이 끝까지 함께했다.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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