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보면 잊히지 않을 커다란 눈을 한, '이것이 시인의 얼굴이다'라고 할 만한 시인 김수영의 사진이 실린 민음사의 '거대한 뿌리'는 내가 읽은 최초의 시집이었다. 두고두고 그 의미를 되새기게 했던 그의 시들은 어떤 배경에서 쓰인 것이며 김수영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과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을 통해 문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보여준 바 있는 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를 읽었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 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 버렸다.'(거미)
한국전쟁 당시 아내의 배반과 반공포로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2년간 갇혀 있었던 경험, 4'19혁명의 실패로 인한 좌절이 시인 김수영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설움'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직면하도록 만든 동력이었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응시를 통해 자신의 모습이 먼지 낀 잡초와 같다는 자각이 없다면, 잡초와 같은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는 타고난 시인이 아니라 시인이 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에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있었다.
강신주는 김수영을 단독성의 시인이라고 본다. 그는 사태든 자신이든 간에 모든 것에 존재하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독성'을 집요하게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독적인 삶을 좌절시키고 방해하는 사회에서 단독적인 삶에 대한 명령을 지키는 것은 무척 위험할 뿐만 아니라 고달픈 일이다. 바로 여기서 그의 비애와 설움이 발생한다. 하지만 김수영은 이런 비애와 설움을 뚫고 비범한 인문학자의 길, 또는 진정한 시인의 길을 걸어가려고 했다.
김수영은 구름의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그가 꿈꾼 구름은 멀리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뭉게구름은 아니었다.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거미)
눈은 시인의 정신을 상징한다. 시인이라면 누구의 흉내를 내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김수영은 젊은 시인들에게 눈을 보고 배우라고 외친다. 시는 하늘로 올라가는 추상으로의 비약이 아니라 땅으로 내려가는 구체로의 비약이기 때문이다.
김수영 생전의 최초이자 유일한 시집 제목이기도 했던 '달나라의 장난'에서 시인은 자기만의 중심을 가지고 도는 팽이에게서 인간의 숙명을 본다. 철저하게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삶을 마무리해야만 하는.
자신이 어떤 시를 써야만 다른 사람을 흉내 내지 않는 단독적인 시가 완성되는지 고민하던 김수영은 이사벨라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을 읽고 이야기한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넘어서겠다는 의지의 선언을 한 것이다. 진창처럼 더러운 우리의 역사와 삶에 '거대한 뿌리'를 내리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자유는 고독할 수밖에 없으며, 자유를 지향하는 사람은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을 담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김수영은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통찰이 '서러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분명 옳은 통찰이지만 자유의 운명과 사명을 떠맡으려면, 일체의 비겁과 나태와 싸우고자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지만, 사람들 사이에 공감과 공명이 일어나는 사회, 시인 김수영이 최종적인 혁명, 혹은 단 한 번만 일어날 수 있는 혁명을 통해 이루기를 원한 미래상이었다.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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