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담양을 다녀왔습니다. 초행길이 아니지만 낯설긴 마찬가지였어요.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나는 전국지도를 펴놓고 담양의 위치를 살핍니다. 인접 도시와 지리적 관계도 눈여겨봅니다. 복잡하게 엉켜 있는 도로망을 확인하다가 갑자기 번거롭다는 생각에 컴퓨터를 열고 스마트폰도 동원해 봅니다. 담양에 관한 여행정보가 주르르 쏟아져 나옵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의 여행담까지…. 마치 빗장을 연 곳간 같습니다.
이것저것 챙겨들고 집을 나섭니다. 으레 중심을 지켜오던 지도인데 어디로 팽개쳐버렸는지 여행 물목에서 빠졌습니다. 소쇄원(瀟灑園)을 입력한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별생각 없이 달립니다. 참 친절(?)도 한 내비게이션입니다.
언젠가부터 나는 지도와 거리감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틈은 날이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린 시절 나는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선생을 선모했습니다. 사관생도 시절에는 독도법(reading map)에 호기심을 가지고 온갖 자료 읽기에 몰입했을 뿐만 아니라 지도상에 주어진 좌표의 실제지를 찾아 밤새워 헤맸던, 제법 난도 높은 훈련을 받기도 하였지요.
지도와 친해질수록 지도는 나에게 많은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경위(經緯)의 접합점이 하나의 위치나 앉은자리가 된다는 것도, 날줄과 씨줄의 교차로 한 필의 베가 짜진다는 것도 모두 지도가 알려준 지혜입니다. 그리고 사회조직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의 문제도 알고 보면 조직 내 직위의 경위를 살피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지도는 나에게 공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활짝 넓혀준 것이지요. 어쩌다 낯선 지역에 머물라치면 나는 습관적으로 그곳의 경위도를 따져보곤 합니다. 그러면 나 자신이 위치한 지도상의 공간을 알 수 있어 퍽 안도가 된답니다. 자연스럽게 동서남북의 방향 감각도 생겨나지요.
얼마 전, 대만에 들른 나는 아름다운 책을 만드는 출판인과 함께 지도 속에 푹 빠져 노닐곤 하였습니다. 고지도 수집가이기도 한 그는 엄청난 양의 희귀본을 소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도를 읽어내는 그 해박한 지식이 경이로웠습니다. 수백 권의 지도를 보관해 놓은 그의 장도관 안에서 나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낸 갖가지 모양의 고지도들이 들려주는 저마다 제작 배경과 인물에 관한 이야기에 넋을 놓곤 했답니다.
14, 15세기 지중해 문화권의 유럽 국가들은 일찍이 지도에 눈이 밝았지요. 바닷길을 개척하면서 동진을 멈추지 않았던 그들에게 지도는 그야말로 명줄과 다름없었을 겁니다. 그 해상로의 길목에 자리한 대만은 16세기 중엽, 포르모사(Formosa)로 알려졌습니다. 그즈음 중국과 일본은 세계지도 위에 올려지지만 한반도는 그 반세기 훌쩍 넘어 'Corea'라는 이름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하고 1894년에 이르러서야 일본인들이 만든 일청한국의 지도가 상세하게 알려지기 시작했다니 지도를 먼저 안 나라들이 역시 세계적이요 선진국임을 알게 해줍니다.
전근대사회의 유럽이나 일본인들의 인식 속에 우리는 어떤 국경과 문화를 가진 국가로 각인되었을까요. 농경중심의 정태적인 사회이던 우리는 공세적인 국가들과 달리 지구촌에 둔감했거나 아니면 지도가 그리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지도는 단순한 위치와 국경만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자연과 역사가 던져주는 수많은 물음에 답을 해줍니다. 민족과 문화변화의 이동로를 말해주는 역사이기도 하고 미래 방향을 알려주는 지남침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중국인들은 좌도우사(左圖右史)라 하여 지도를 역사서의 반열에 두고 있나 봅니다.
손안에 든 문명이기들이 모든 궁금증을 척척 해결해주는 요즘 난해한 지도는 점점 멀어지기만 합니다. 숫제 번거로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고 할까요.
방바닥에 온통 지도를 펼쳐놓고 거미줄처럼 연결된 세계 항로를 더듬어보거나 나라 전도 위에서 대간과 정맥은 물론 지경(地境)을 이해하는 아날로그적 독도법이야말로 지도가 간직한 수많은 이야기와 상상세계를 엿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 지도 속에는 칭기즈칸의 말발굽소리가 들리고 북극 해원에서 녹아내리는 얼음조각이 보이는가 하면 한창 열기를 더해 가는 지구촌의 축제, 올림픽의 함성이 들리기도 합니다. 그 위에 우리가 푯대를 세우고 나아갈 미래의 발자국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답니다.
김정식/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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