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 애들론 감독의 '바그다드 카페'는 뚱뚱한 중년여성이 커다란 트렁크와 함께 사막 한가운데 버려지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관광여행 중 남편과 싸운 끝에 사막에 홀로 내려버린 쟈스민은 정처 없이 걷다가 '바그다드 카페'라는 곳에 도착한다. 모텔의 안주인 브렌다 역시 지긋지긋해하며 남편을 방금 내쫓은 참이었다. 상처 입은 두 여성은 천천히 우정과 신뢰를 쌓아가며 바그다드 카페를 사랑과 환상이 가득한 매력적인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바그다드 카페처럼 상처와 슬픔을 치유하는 마법과도 같은 장소와 사람들의 이야기인 공선옥의 소설 '영란'을 읽었다.
1990년대 중반에 펴낸 단편집 '피어라 수선화' 이후 쉬지 않고 소설과 산문을 써온 공선옥은 따뜻한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소외된 이웃들의 삶을 깊이 있게 다루어 왔다.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한 도시에서 '가장 예뻤던 시절을 슬프고 아프게 보낸' 20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인 '내가 가장 예뻤을 때'와 한적한 시골마을에 들어서는 불법시설에 항의하는 노인들의 힘겨운 싸움을 다룬 '꽃 같은 시절'이 비교적 최근작이다. 이 시대 어떤 작가보다도 넓고 깊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공선옥은 뛰어난 이야기꾼이기도 해서 그의 소설은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게 되는 힘을 갖고 있다.
소설 '영란'의 주요 배경은 남도의 먼 항구도시 목포다.
소설의 얼개는 이렇다. 남편과 아들을 사고로 잃은 '나'는 빵과 막걸리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중이다. 어느 날, 나는 남편 선배의 친구이자 소설가인 이정섭을 만난다. 갑작스레 친구의 부음을 들은 정섭은, 홀로 위태롭게 남을 나를 이끌고 목포로 향한다. 무심결에 따라간 목포에서 우연히 찾아 들어간 '영란여관'. 나는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수옥, 나를 보며 가슴을 두근대는 완규, 그의 여덟 살배기 조카 수한,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사는 슈퍼 안주인 조인자 등을 만난다. 유달산의 생명력 넘치는 풍경과 항구도시 사람들의 애틋한 정감에 나는 과거의 상처를 보듬고 '영란'으로 거듭난다.
이 소설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 등장인물의 공통점은 저마다 사랑으로 인한 상처와 슬픔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이 있으면서도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가 한꺼번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등장인물인 소설가 정섭은 유달산을 오르며 생각한다.
"우리 인생에서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시간 외에 아무 목표도 없이 그저 '소요'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목포에서의 소요가 찢긴 내 삶에 새살을 돋게 할 수 있을까. … 세상에는 명확한 것만이 선은 아니겠지만, 자기 자신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정섭은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옹색스러울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고 헤아리지 못했고 헤아릴 필요가 없다고까지 여겼다.…"
저마다 상처를 끌어안고 힘들어하던 사람들이 영란과 정섭과 함께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이 맛깔스러운 목포 사투리와 정겨운 분위기 속에서 펼쳐진다. 등장인물 저마다가 안고 있는 상처에 공감하며, 등장인물들이 서로 보듬어가는 인정에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낀다.
우리도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생의 막다른 길목에 섰을 때 목포에 갈 수 있다면, 그곳에서 영란여관과 정선생과 모란을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이 소설을 읽으니 목포에 한 번 가고 싶어진다. 소설 속 영란의 모델이 되었던 인물이 실제로 운영하고 있다는 영란식당, 서른의 새댁이 이제는 예순이 되었다는 영란 아줌마의 병어찜이며 민어회를 먹어 보고 싶다. 짙은 남도 사투리를 들으며 거리를 걷고, 목포 사람들이 기쁠 때건 슬플 때건 언제나 올라간다는 유달산에 올라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라도 한 번 흥얼거려 보고 싶다.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