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순(56'중국) 씨는 보통 엄마였다. 조선족인 조 씨는 자기 삶보다 항상 자식의 미래를 걱정했다. 고향인 중국 길림성을 떠나 한국에 온 것은 둘째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중국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다. 조 씨는 아들이 결혼해서 살 집을 마련해 주기 위해 5천만원을 모아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조 씨는 한국에 온 지 2년도 채 안 돼 뇌출혈로 쓰러졌고 지금 그가 꿈꿨던 삶은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다.
◆가난의 시작
27일 오후 대구의 한 대학병원. 머리를 짧게 깎은 조 씨는 침대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지난 5월 뇌출혈로 쓰러진 뒤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생활을 하며 그의 삶은 침대에서 멈췄다. 조 씨 가족의 터전은 중국 길림성 길림시였다. 가진 것이 없었던 가족은 논을 빌려 벼농사를 지었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힘들었지만 조 씨는 자녀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다. 첫째딸 송성애(34) 씨는 길림시에서 차로 5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에서 조선족 중학교에 입학해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농사일을 그만두고 건설 공사 현장을 돌며 일했다. 아버지는 요녕성 공사장에서 터파기 공사를 하다 흙이 무너지면서 다른 인부 한 명과 함께 매몰됐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송 씨 나이 열다섯 살 때 일이었다. 타지에서 치러진 장례식에서 엄마와 친척 몇 명이 아버지의 죽음을 배웅했고 송 씨는 여름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서야 부고를 접했다. 아버지가 죽은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그때가 시험기간이었는데 공부에 방해될까 봐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연락을 하지 않았어요. 장례식도 못 가보고…."
외롭게 생을 마감한 아버지는 지금도 송 씨에게 상처로 남아 있다.
◆이웃이 떠나는 고향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가세는 더 기울었다. 엄마는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한 달에 우리 돈 20만원 정도 벌었다. 이런 상황에서 송 씨는 가까스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아무리 가난해도 학교는 졸업해야 한다"는 엄마의 의지 덕분이었다. 하지만 남동생(26)은 초등학교 졸업 뒤 중학교 3년을 채우지 못하고 학교문을 나서야 했다. 송 씨는 "아버지도 없는데 자기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며 베이징으로 가서 식당에 취업했다"며 "엄마는 남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의 짐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들에게 한국은 꿈의 땅이었다. 이웃들도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죄다 한국으로 돈을 벌러 떠났다. 고향에 남은 것은 어린아이들과 노인들뿐이었다. 한국에서 돈을 모은 조선족들은 중국으로 돌아가 도심에 있는 집을 산다. 송 씨는 "부부가 함께 한국에 가서 동시에 일하면 5년 안에 중국에서 집 살 돈을 모을 수 있다"며 "우리 엄마 목표도 5천만원을 모아서 남동생 줄 집을 사는 거였다"고 말했다. 엄마 조 씨는 세 식구 중 가장 먼저 한국으로 향했다. 체류기간이 짧은 단기종합비자(C-3)를 받아 대구에 왔고, 비자 특성상 기관에서 한국어 교육을 받으면서 일을 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12월 대구 성서산단의 한 의류 재활용 사업장에 취업해 의류를 분류하는 일을 했다. 하루 종일 한 자리에 서서 일을 하다가 저녁이 되면 기숙사로 돌아가는 일상이었지만 조 씨는 불평하지 않았다.
◆무너진 꿈
이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조 씨는 올해 5월 토요일 잔업 근무를 끝내고 욕실에서 샤워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한참이 지나도 욕실에서 나오지 않는 조 씨를 이상히 여겨 기숙사 동료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조 씨는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뇌출혈 진단을 받고 사고 다음날 수술까지 받았지만 지금까지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침대에 누워 지낸다. 딸 송 씨가 엄마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병간호를 한 지 벌써 석 달이 다 돼 간다.
회사의 도움으로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신청을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근로복지공단 측은 "조 씨가 했던 일이 재활용 의류를 분류하는 단순 작업인데다 단기간 또는 만성적인 과로가 있다고 볼 만한 객관적인 근거가 없다"며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현재 송 씨는 24시간 엄마 곁을 지키고 있으며 남동생도 한국에 와 전남 목포에서 일하고 있다. 엄마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1차 병원비 1천만원은 달서구청이 전달한 긴급 의료지원금 300만원과 재활용 의류 회사 사장이 준 성금 200만원, 엄마가 모아둔 500만원으로 충당했다. 남은 입원비 500여만원과 앞으로 발생할 추가 병원비는 송 씨와 남동생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엄마는 항상 성경책을 끼고 살았다. 일찍 남편을 잃은 외로움, 지독한 가난 속에서 두 자녀를 키워야 하는 책임감을 교회에서 위로받았다.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집과 가까운 교회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이제는 송 씨가 엄마를 위해 기도할 차례다. 자식 때문에 제 삶을 희생한 엄마를 위해서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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