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면 산속 작은 암자에서 군불이나 지피는 부목살이가 꿈이었다 마당에 풀 뽑고 법당 거미줄도 걷어내며 구름처럼 한가하게 살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요즘 나는 신사동 어디쯤에서 돼지꼬리에 매달려 파리 쫓는 일을 하며 지낸다 청소하고 손님 오면 차도 끓여내는데 한 노골이 보더니 굽실거리는 눈매가 제법이라 했다
떫은 맛이 조금 가시기는 했으나 아직 덜 삭았다는 뜻으로 들려 허리를 더 구부리기로 했다 지나온 길 들개처럼 자꾸 돌아보면 작은 공덕이나마 허사가 될 것 같아서다
----------------
어떤 시를 읽으면 아무 기교 없이 쉽게 쓴 것 같아 잘 읽히는 시가 있습니다. 그런 시는 시간이 지날수록 입안에 은근한 맛이 도는 좋은 차처럼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시 읽기도 마찬가지여서, 이런 시는 오래 읽을수록 뜻이 더 우러나옵니다.
절간에서 군불 때는 부목살이를 꿈꾸는 시인. 그런데 청소하고 차 끓이는 세속의 삶이 부목살이 아니냐 어느 노골이 한수 가르쳤습니다. 굽실거리는 눈매가 들켰으니 아직 길이 멀다는 뜻입니다. 오래 읽으니, 지나온 길을 거두어들이는 시인의 허리가 눈에 훤합니다.
시인·경북대교수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