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자정 무렵 기자회견장에 들어서는 문재인 후보는 웃음 띤 얼굴이었지만 많은 지지자들은 가슴으로 울고 있었다. 문 후보는 "패배를 인정한다. 박근혜 당선인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며 "당선인께서 국민통합과 상생의 정치를 펴주실 것을 기대하며, 나라를 잘 이끌어 주시길 부탁 드린다"고 말했다. "믿는다"가 아니라 "기대한다"란 표현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결과에 승복하는 아름다운 패자의 모습이었다.
문 후보 기자회견 직전에 박근혜 당선인은 광화문 광장에서 가진 연설에서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했다. 선거기간 중 측근 인사들의 죽음을 맞을 때 가장 힘들었으며, 유세도중 알밤을 쥐여 주며 격려하던 지지자가 생각난다며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문 후보와 그 지지자들에 대한 위로나 포용의 언급은 없었다. 이제 막 당선이 확정된 직후라 경황이 없었을 터였다.
다음 날 박 당선인은 대통합의 메시지를 일성으로 내놓으며 화합 행보에 나섰다. 당사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과거 반세기 동안 극한 분열과 갈등을 빚어 왔던 역사의 고리를 화해와 대탕평책으로 끊도록 노력하겠다"며 지역과 성별, 세대를 가리지 않는 인재등용을 약속했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의 마음도 잘 챙기고 담는 것도 중요하다는 언급 역시 이 같은 행보를 뒷받침한다. 문 후보를 향해서는 패배에 대한 위로와 함께 앞으로 국민을 위해 협력과 상생의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제안했다.
이번 대선기간 중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가 통합과 소통이다. 통합을 위해서는 승자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럴 때 패자는 그 손을 잡고 승자가 국민을 위해 대의를 펼칠 수 있도록 지지자들의 마음을 도닥여 국가발전에 동참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박 당선인이 선거 기간 구호로 내세운 100%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대진영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이를 구체화한 실천방안이 나와야 할 것이다.
문 후보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지도 관심사다. 당장 국회의원직을 사퇴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대통령 후보까지 한 분이 의원 신분에 연연하는 것이 큰 의미는 없다고 본다. "꿈을 접는다"는 말로 차기 불출마를 천명한 만큼 현실 정치에 얽매이기보다는 대승적 관점에서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방안을 모색해주기를 기대한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아쉽게 패한 앨 고어는 이후 환경운동에 앞장서 그 공로로 2007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사견이기는 하나, 앞으로 문 후보가 에너지 환경문제를 다루는 국민운동 또는 북한의 개방과 발전을 위한 지원 운동에 나서는 것은 어떨까 한다.
과거에 비해 사회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변화한 만큼 이제는 원로들의 처신도 바뀔 필요가 있다. 정치인이나 고관대작들을 불러 인사나 받으며 지내거나 다들 듣기 좋은 덕담만 내놓을 것이 아니라, 그간 쌓은 경륜을 활용해 국가 사회에 의미 있는 봉사를 해야 한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하려면 앞장서 무리를 이끄는 경험 많은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금 우리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작금의 세계경제환경을 감안할 때, 앞으로 5년은 대한민국이 재도약해 선진국으로 진입하느냐, 아니면 소득 2만달러대의 고만고만한 중진국으로 늙어가느냐의 변곡점이 될 것이다. 이는 각자 편을 갈라 등 돌리지 않고 모두가 힘을 모아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 비로소 달성 가능한 목표다. 개정된 국회법에 따르면 여야가 합의하지 않고는 사실상 법안 하나 통과시키기 어렵다. 지난 5년간처럼 서로 자기주장만 앞세워 싸우게 된다면 국민 가슴에 피멍만 쌓이게 된다. 그리고 그 원성과 분노는 기존 정치권의 판도를 뒤엎어 버릴 거대한 파도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대선기간 중 양 진영에서 험악한 비방이 오가는 중에도 후보 본인들은 최대한 예의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 후보 모두 남다른 품성과 경륜을 갖추고 있으며, 치열한 선거전을 치른 것 역시 근본적으로는 국민의 삶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선택받고자 함이었다. 우리 국민은 최종적으로 박근혜의 리더십을 선택했지만, 문재인의 열정에도 절반 가까운 수가 지지를 보냈다. 승자인 박 당선인이 먼저 따뜻한 손을 내밀어 패자가 힘을 보탤 수 있는 공간을 열어 주는 통 큰 정치를 기대한다.
이재술/딜로이트안진 총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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