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도용복의 지구촌 모험] (40)남아프리카 공화국

"만델라는 우리의 아버지…우리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1990년 2월 만델라가 석방된 후 백인정부와 만델라의 협상이 지지부진하는 바람에 남아공의 정국은 안갯속에 가려졌다. 최대의 걸림돌은 흑백 인종 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흑흑 간에 있었다. 만델라가 이끄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부텔리지가 이끄는 줄루족단체(INKATA)가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똘똘 뭉친 900만 줄루족을 등에 입은 INKATA는 '만델라가 정권을 잡느니 백인들의 정권이 그대로 유지되는 게 낫다' '줄루는 독립하겠다'는 등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만델라는 끈질기게 줄루족을 달랬다.

어느 날 요하네스버그 한복판에 있는 ANC 본부 건물 아래서 전통 줄루 복장을 한 시위대열이 줄루 독립을 외치고 있을 때 ANC 건물에서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총격이 가해지고 길바닥엔 유혈이 낭자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흑인정권이 탄생하고 만델라는 대통령, INKATA의 부텔리지는 내무부장관이 되었다. 그리고 국회가 구성되자마자 줄루시위대 무차별 총격사건이 도마 위에 올랐다.

'총격 동기는?' '발포 명령자는?' '정확한 사상자는?' 구구한 설로 국회가 난장판이 되었을 때 만델라가 등단한다. '발포 명령자는 본인이었다. 경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 그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고 만델라에게 책임 추궁을 하지도 않았다. 이 대목에서 만델라의 위대함이 엿보인다.

'내 책임은 없다' '지난 일이라서 모르겠다'며 덮으려고만 했다면 두고두고 그의 원죄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을 그는 정직이라는 가슴속의 무기로 살기등등하던 900만 줄루족의 목소리를 단숨에 잠재워 버린 것이다.

요하네스버그 북동쪽 외곽, 국제공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십만 명의 흑인이 난민촌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삶을 이어가는 곳, 뎀비사가 자리 잡고 있다. 무허가 판자촌이 이처럼 방대해지면 시당국도, 정부도 손을 쓸 수 없다. 결국은 양성화시켜 전기를 넣어주고 공동수도를 군데군데 설치해 준다. 백인들은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지뢰밭보다 더 겁낸다.

판잣집 밖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흑인 여자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예상 외로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에 친절하고 솔직하게 대답하며 거부감 없이 집안 내부까지 공개했다. 35세의 마키는 공항 근처 백인 구역인 캠프톤파크에 있는 던호텔의 청소부로 일하며 한 달에 20만원 가까운 벌이를 하고 있다. 결혼도 제대로 못 해보고 이 남자 저 남자 거치며 1남 3녀를 낳아 7세짜리 아들만 이 집에 함께 살고, 나머지 아이들은 기차로 24시간이나 떨어진 친정집에 맡겨 두었다. 판잣집 내부는 4, 5평 될까 말까 하지만 냉장고'TV'가스레인지'침대까지 갖춘 원룸 주택 같았다. 남자 옷이 걸려 있어 물어봤더니 군수공장에 다니는 보이프렌드가 가끔씩 이 집에서 자고 간다나….

"만델라가 대통령 후보로서 가장 목소리를 높인 것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주택 보급이라 했는데 당신은 아직도 이런 집에서 살고 있다. 아직도 만델라를 좋아하는가?" "만델라는 우리의 아버지다. 우리는 서두르지 않는다."

그녀가 장롱 깊숙이 넣어둔, 정부에서 발급한 주택 공급 순번이 기재된 서류를 내보이며 활짝 웃는다. 지독한 흑인 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가 서슬 퍼렇던 시절, 어둠살이 내리면 요하네스버그 온 시내에 사이렌이 울렸다. 청소부나 건축 공사장 인부로 일하고, 건물 유리창을 닦고, 식당 주변에서 일하던 흑인들은 서둘러 시 외곽 경계선 밖으로 빠져나가야 했다.

밤중에 시내에 얼씬거리다 백인의 총에 맞아 죽어도 흑인은 항의 한마디 할 수 없었다. 그런 세상이 바뀌어 요하네스버그 다운타운의 밤은 흑인 천지가 되었고, 백인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홍등가 가로등 아래 가뭄에 콩 난 듯이 백인 매춘부가 담배를 꼬나물고 흑인 남자들에게 비싼 화대를 부른다.

그렇다면 백인들은 모두 외국으로 빠져나갔는가? 아니다. 요하네스버그 북쪽 외곽에 백인들의 신흥도시 샌튼이 미국의 어느 도시처럼 숲 속에 쌓여 멋진 빌딩들이 솟아오르며 활기에 넘친다. 백인 천지에 흑인들이 띄엄띄엄 거리를 청소하고 벽돌을 나른다.

그리고 요하네스버그의 서북쪽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신기루처럼 산기슭에 솟아오른 불야성이 있다. 이름하여 선시티(Sun City). 아프리카의 디즈니랜드인가, 라스베이거스인가?

백인들은 룰렛을 하고 흑인은 콜라잔을 나른다. 이곳에 바로 밀리언 챌린지가 열리는 게리플레이어 골프 클럽이 있다. 비단결 같은 페어웨이 잔디 위로 흑인과 백인이 나란히 걸어간다. 자세히 보면 백인은 골프채를 휘두르고, 흑인은 골프백을 메고 있다. 백인의 얼굴엔 자신감이 넘치고, 흑인의 얼굴엔 여유가 있다. 그리고 그들 둘은 격의 없이 마주 보고 웃는다.글'사진 도용복 오지여행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