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한 해의 출발점에 섰다. 많은 이들이 묵은 것을 털어내고 희망과 미래를 말하지만 아직 그럴 기분이 아닌 국민도 많다. 적어도 48%는 그렇다. 2012년을 휩쓴 정치 바람이 시베리아 냉기류처럼 국민의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18대 대선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국지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도 절반의 국민이 아직도 속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박근혜 당선에 크게 기여한 50대에 대한 성토나 뜬금없는 선거 부정 의혹이 불거지고 있는 것도 믿기지 않은 패배로 인한 내상이 그만큼 깊다는 소리다.
모든 승부에는 후유증이 남는다. 타이틀이 걸린 경기는 말할 것도 없고 흔한 친선경기에서도 지면 속이 아리고 분통이 터진다. 앞으로 5년 아니, 미래 한국 정치와 사회를 좌우할 중요한 대선에서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니 눈물과 외침, 넋두리가 왜 없겠나. '안철수로 단일화됐다면 이기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말한 어느 스님의 넋두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에서 쏟아낸 문재인의 통한의 눈물도, 백악관에 개표 부정을 청원하는 철없는 네티즌들의 외침 모두 실패와 좌절의 허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 가운데 탈출구가 막힌 2030세대의 절망과 한숨 소리가 유독 크다.
승리한 쪽에 표를 던진 유권자들 속이라고 편할까. 비록 박근혜 당선인에게 국정 운영권을 주었지만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선택이다. '노무현 정부에 5년 맡겨봤더니 불안하더라'라는 경험이 새로운 카드에 눈길이 쏠리도록 만든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문재인 후보에게 던진 48%의 표는 박근혜 당선인을 반대하는 표가 아니다. 두 사람 중 상대적으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더욱 소중히 할 후보라는 점에서 선택한 것일 뿐 반대표로 인식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같은 논리로 박 당선인에게 던진 51.6%의 표도 전적으로 찬성한다는 표는 아닐 것이다. 국정 운영 능력에서 좀 더 안정감 있고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표를 준 것일 뿐 절대 지지의 의미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유권자는 언제든 변하고 표심은 시간이 흐를수록 깐깐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선 후에 실시한 한 여론조사의 결과도 이를 증명한다.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와 한국리서치가 최근 실시한 대선 유권자 분석 여론조사에서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유권자의 35%가 18대 대선에서는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2년 대선은 '40대의 반란'이라고 할 만큼 40대의 표심이 선거 결과를 갈랐다. 노무현을 찍었던 당시 40대의 47%가 10년이 지나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지지로 궤도 수정한 것은 주목할 부분이다.
지금 허탈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2030세대에게는 마음껏 고함치고 울분을 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 이마저도 막고 혀를 찬다면 우리 사회와 정치판이 너무 속 좁고 삭막하지 않은가. 폭풍우 뒤에 무지개를 볼 수 있듯 절망의 그림자가 깊어야 희망과 새 정치에 대한 기대와 확신도 커지는 법이다.
무엇보다 국민이 새 정부에 바라는 것은 국민의 곤궁한 삶을 돌아보고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정치다. 여당 자신도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탐욕의 정치는 대립과 갈등을 부르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한국 정치가 저주와 증오의 정치판이 되어온 것이다. 이제는 갈등과 대립이 아니라 해소(解消)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국민의 상처를 보듬고 기회의 사다리를 놓아주는 힐링의 정치, 톨레랑스의 정신이 깊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당선인의 상대편에 표를 준 48%의 국민도 수긍할 것이고 51.6% 표심도 그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가 갈리고 세대가 갈리면 한국 사회, 한국의 정치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막스 베버는 "정치란 열정과 균형 잡힌 판단으로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이라고 했다. 단시간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면 정치는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있다. 얼마 전 EBS 방송을 통해 방영된 스웨덴 국민의 아버지 타게 에를란데르 총리의 정치 역정처럼 돈이 아니라 사람을 믿는 정치, 상생의 정치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제 민주주의라는 눈사람에 눈썹도 붙이고 고깔도 씌워야 한다. 그게 새 정부의 몫이자 한국 정치의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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