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그레고리

'진도브레, 그레고리'. '안녕하세요.'

폴란드말로 인사를 받은 그레고리가 한국말로 대답을 합니다. 그레고리는 유럽의 관광버스운전사입니다.

동유럽의 여러 도시를 1주일에 다녀오는 여정. 첫날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뮌헨에 도착한 시각은 자정이 다 되어서였습니다. 버스는 하루 운행이 끝나면 11시간을 쉬어야 한다는 유럽의 정차 규정 때문에 다음 날 오전 11시가 돼야 다시 시동을 걸 수가 있었습니다. 겨울이라 해도 짧은데. 다행히 일주일에 한 번만 허락된다는 9시간 정차 규정으로 11시 출발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 속에 오래 자리하던 유럽여행이었습니다. 책과 사진을 통해 그려보던 유럽의 정교하고 화려한 문화유산을 직접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서였지요. 자유여행이 스스로 메뉴를 정하고 재료를 엄선해 손수 요리를 해먹는 방식이라면 패키지투어는 인스턴트식품 같다고나 할까요. 얕은 맛을 내는 패키지투어가 몸으로 부딪혀 발견하게 되는 보람과 기쁨을 알게 해주는 자유여행의 참맛을 능가할 수는 없겠지요. 그럼에도 편안함에 대한 유혹과 시간의 제약은 뒤늦은 휴가에 대한 선택의 여지를 없게 해주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서양동화에 나오는 예쁜 중세마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의 프라하. 시청광장에 있는 커다란 천문시계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시계에 붙여놓은 여러 가지 모양의 조각상들 때문입니다. 정각이 되자 그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종을 치고, 빙글빙글. 톱니바퀴에 전달되는 동력을 이용한 프라하의 기계식 천문시계는 1410년경에 그 기초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시기에 시계가 만들어졌습니다. 기계식 시계는 아니지만 세종 때 과학자 장영실이 만든 시계입니다. 지구모양의 안쪽 반구에 비치는 그림자의 위치로 시간을 측정해 주는 해시계 앙부일구는 시간 뿐 아니라 24절기까지도 정확하게 나타내주는 천문기구입니다. 움직이는 프라하의 시계 조각상들이 대단해보인다면 우리에게도 물시계인 자격루가 있습니다. 1434년(세종 16년)에 만들어진 자격루는 목각인형들을 배치해 일정 간이 지나 물이 차오르면 구슬이 떨어져 굴러가 시간을 맡은 인형의 팔꿈치를 건드려 종을 치게 함으로써 자동적으로 시간을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세종실록에 근거해 재현한 자격루의 형태는 볼의 운동, 지렛대의 원리 등을 이용해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가 프라하의 천문시계와 비교할만 합니다. 비록 문헌에만 존재한다하여도 과학기술문화유산에 대한 우리의 자존심입니다.

프라하의 문화유산을 보러 가는 가로수 길을 따라 우리기업의 광고깃발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젊은 한국인 현지가이드는 전 세계에서 연간 1억 명의 관광객이 모여드는 프라하에 살면서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했습니다. 30여 년 전 외국에 살며 한국인으로서 느꼈을 법한 자랑스러움에 대한 기준이 한 세대 만에 달라졌습니다.

유럽의 호텔은 어두웠습니다. 등에서 조금만 떨어진 공간에서 무엇을 한다는 것이 매우 불편할 정도로 어두웠습니다. 도시도 그러하였습니다. 어둠이 깔린 상가에는 인적이 사라지고 은은한 간접조명만이 도시의 주요 건물들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호텔마다 쓰지 않은 타월을 걸어둘 것을 당부하는 메시지, 돈을 내야 사용할 수 있는 외부 화장실과 값비싼 생수는 유럽인들의 전기와 물에 대한 절약 정도가 우리 사회와 차이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오자, 반짝이는 간판들로 치장한 화려한 도시의 밤거리가 새삼스러웠습니다. 환하게 불을 밝힌 상가들, 그리고 그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 밤이 되면 적막강산으로 변하는 유럽의 상가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문득, '외국에서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당당할 수 있게 해준 게 바로, 지난 30년간 우리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그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린 우리는 겉에서 보이는 것 만큼 속이 온전한 걸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차도 하루에 최소한 11시간을 쉬어야 한다는 나라에서, 4시간 반을 달리면 반드시 중간에 45분의 휴식을 취해야 한다던 그레고리. 한 달 동안의 휴가를 잘 보내기 위해서 1년 중 나머지 기간을 일하고 저축한다던 그의 밝은 표정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백옥경/구미과학관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