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희망을 말하고 싶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희망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언어로 개념화되는 어떠한 미래도 생각하지 않았다. 희망은 멀어서 보이지 않았고, 희망 없는 세상에서 죽음 또한 멀어서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지만, 살아 있는 나에게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수 없이 분명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이 힘겹게 겨우겨우 흘러갔다. 저녁이면 먼 섬들 사이로 저무는 햇살에 갯고랑 물비늘이 반짝였고, 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소멸하는 날들은 기진맥진했다. (김훈의 '칼의 노래' 중에서)

김훈의 언어가 끝내 쓸쓸하다. 그래서 내가 고쳐 썼다. '나는 죽음을 자주 생각했다. 나는 희망을 더욱 자주 생각했다. 나는 언제나 내가 걸어가는 미래를 언어로 개념화했다. 희망은 멀리 있었지만 다가옴을 믿었고, 희망 없는 세상은 나에게 죽음과도 같았다. 죽음을 생각하긴 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내가 무엇보다도 존귀했다.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말들이 힘겹게 흘러갔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내 몫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이면 먼 섬들 사이로 저무는 햇살에 갯고랑 물비늘이 반짝이는 걸 보기 좋아했고, 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소멸하는 날들을 사랑했다.'

고치고 나니 더 쓸쓸했다. 어제 나는 밤중에 일어났다. 한겨울의 서늘한 바람 속에서 많이도 아팠다. 내가 맡는 내 몸의 냄새가 고단했다. 내 꿈은 정말 단순하다.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사는 것. 그리고 지난날처럼 그냥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보고 걸으며 말하고 노래하고 글을 쓰고 싶었다. 김훈이 그랬던 것처럼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수 없는, 옳음과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무기력한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왔다. 갑자기 배가 고팠다. 알고 보니 끼니는 참으로 중요했다. 어떤 존재들도 끼니와 관련된 부분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끼니에 대한 욕망은 속수무책이었다. 끼니를 이길 수 있는 어떤 명분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나간 끼니는 이미 안중에 없고, 다가올 끼니가 전부였다. 그래서 존재들은 어떤 명분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절망은 다시 내 몫이었다. 나조차도 끼니의 무한한 힘에 언제나 무력했다.

끼니는 절대하다. 부정할 수도, 부정하고 싶지도 않은 절대다. 문제는 '거기까지'라는 사실이다. 그 '절대'가 '절대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요즘 교육은 바로 거기까지만 가르친다. 끼니가 소중하다는 것. 하지만 교육이 그것을 가르칠 필요는 없다. 그건 이미 절대하기 때문이다.

교육이 가르치는 것은 어떻게 끼니를 구하고, 어떻게 끼니를 먹느냐는 부분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끼니를 구하고 단지 내 것이니까 나에게 넘치는 끼니조차 내 속에 품고 사는, 그러한 욕망을 내려놓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다. 거기서 교육 현장에 철학이 들어갈 공간이 마련된다.

갑자기 떠오르는 동화 한 자락. 내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싶은, 사람 살아가는 풍경이다. '어떤 사람이 지옥 구경을 하게 됐다. 지옥에서는 밥 먹는 시간이 제일 괴로웠다. 밥상에 팔만큼이나 아주 긴 젓가락과 숟가락이 놓이는 까닭에, 음식을 제대로 입에 넣기가 힘들다. 밥그릇이 엎어지기 일쑤다. 그럼, 흙에 뒤범벅된 음식을 서로 먹겠다고 싸운다. 이런 모습을 보며 진저리를 치던 사람이 이번에는 천국 구경을 하게 됐다. 지옥과 반대로, 천국에서는 밥 먹는 시간이 제일 즐겁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밥상이 똑같다. 역시 긴 젓가락과 숟가락이 놓여 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음식을 흘리지 않는다. 긴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서로에게 떠먹여 주기 때문이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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