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종일 작업실에 틀어박혀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다 보니 어느덧 화려한 도시의 밤이 창문 밖에서 춤을 추고 있다. 아침부터 혼자 떠들고 있던 낡은 카세트는 음악과 함께 밤이 깊어 감을 알려준다. 붓을 내려놓고 습관처럼 한 잔의 차와 함께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에 초점을 맞추어 불빛을 헤아린다. 주택가의 희미한 작은 불빛들은 오늘의 희로애락을 나누며 내일을 위한 또 다른 희망을 만들어가느라 서로 가까이서 소곤대고 있다. 그 골목길 외로운 가로등과 뿌연 포장마차 불빛이 서로 묘한 웃음을 나눈다.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면서 한밤 고층 작업실의 적막함을 즐겨본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와 작업실에 도착했다. 의무감으로 붓을 들었다. 움직이는 것이 귀찮기도 했지만 시간을 아낄 요량으로 점심은 간단한 배달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이는 그동안 하지 못한 작업을 조금이나마 만회할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나마 오후가 되면서 작업에 속도가 생겨 탄력이 붙는 듯하더니 창밖에 어둠이 깔리고 밤이 깊어지면서 붓질 속도가 더디어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업실에서의 하루가 너무 짧아 차 한 잔의 여유가 아쉬웠는데 최근 어수선한 머릿속 때문인지 나태함을 자주 보게 된다.
새해가 시작된 지도 벌써 첫 달의 반 이상이 지나갔다. 최근 이런저런 안팎의 이유로 작업실을 비워 두는 시간이 평소보다 많아 팔레트 위에 짜둔 물감이 굳어 있는 날도 있었다. 문득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에 지키지도 못할 자신과의 약속을 써서 화실 벽면에 붙여두고 객기를 부렸던 철부지 시절이 기억나 쓴웃음이 지어진다.
수시로 울려서 작업을 방해하기도 하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오늘따라 몇 번을 쳐다봐도 긴 시간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 갑자기 누군가 작업실 문을 열고 반갑게 나타날 것만 같다. 고마운 인연의 많은 얼굴들이 창가를 지나 불빛 속으로 겹쳐진다. 오늘 작업은 여기서 끝내야겠다. 늘 마지막 정리를 위해 반들거리게 팔레트를 닦는 손놀림이 가벼웠는데 오늘은 힘만 들이고 대충 닦고 만다. 이럴 때 늘 스스로 진단하여 발급하는 처방전이 있다.
떠나자!
화가라는 핑계로 봄을 열기 위한 차가운 대자연의 숨소리를 들으며 하늘 보기를 위한 스케치를 빙자해 겨울여행을 떠나자. 어쩌다 작품 소재 하나 건지지 못하고 더 많은 고민과 과제가 만들어져서 돌아오는 길이 무겁고 고단할지라도….
누구나 형편에 따라 여행 장소와 방법 등이 다를 수 있겠지만 어느 날부터 떠난다는 그 자체로 한 가지 이상은 치유된다는 믿음이 생겼다. 여행은 사전에 많은 계획을 필요로 하기도 하겠지만 그런 계획이 없는 것에 더 익숙해 있다.
빈대도 낯짝이 있다는데 식구들 잠든 늦은 시간에 도둑고양이가 되어서 떠나기 위한 작은 가방이라도 챙겨야겠다.
김윤종 화가'gilimi80@hanmail.m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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