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부 독일 파견 50년…그들이 청춘 희생한 대가로 우리는 희망을 얻었다

대구경북 출신인들 당시 회고

독일 함부른 탄광에서 3년간 일했던 조충래(76) 씨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일행이 1964년 12월 10일 탄광 현장을 방문해 기념촬영한 사진을 보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조 씨는
독일 함부른 탄광에서 3년간 일했던 조충래(76) 씨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일행이 1964년 12월 10일 탄광 현장을 방문해 기념촬영한 사진을 보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조 씨는 " 당시 박 대통령 내외가 독일 아우토반 시찰과 동시에 파독된 간호사와 광부를 위로차 현장을 방문했다" 며"막장에서 고생하는 광부들을 보고서는 함께 부둥켜 안고 많이 울었다"고 회상했다. 조 씨는 1964년 11월 4일 독일 탄광에 세 번째 팀으로 파견돼 3년간 광부생활을 한 뒤 1967년 12월 귀국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이역만리 독일 광산에서
이역만리 독일 광산에서 '가난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근면과 인내의 상징이었다. 석탄을 캐고 갱도를 지지하는 버팀 시설을 설치하는 등 파독 광부들은 탄광의 최전방에서 구슬땀을 흘렸다. 한 인터넷 블로그에 소개된 파독 광부들의 기념사진.
1964년 12월 독일 루르 공업지대의
1964년 12월 독일 루르 공업지대의 '루이스부르크'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한국인 광부들을 접견하고 있다. 매일신문 자료 사진
1964년 12월 10일 조충래(76) 씨가 대통령 수행기자로 독일 함부른 탄광을 방문한 류혁인(왼쪽) 당시 동아일보 기자와 함께 찍은 사진. 류 기자는 조 씨와 인척 관계로 후에 청와대에 입성해 정무담당 수석비서관으로 박대통령을 보좌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1964년 12월 10일 조충래(76) 씨가 대통령 수행기자로 독일 함부른 탄광을 방문한 류혁인(왼쪽) 당시 동아일보 기자와 함께 찍은 사진. 류 기자는 조 씨와 인척 관계로 후에 청와대에 입성해 정무담당 수석비서관으로 박대통령을 보좌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벌써 50년이 흘렀네요. 돈을 벌기 위해 떠났지만 희망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1963년 12월 21일 광부가 되려는 대한민국의 젊은이 123명을 실은 첫 비행기가 독일로 떠났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천936명의 광부가 독일에 파견됐다. 이들은 이전부터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 1만1천57명과 더불어 외화 획득을 위해 이국땅을 밟은 산업역군이다. 올해로 광부 파독 50주년을 맞았지만 이들에게 파독 광부로서의 생활은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다.

◆왜, 어떻게 떠났나

8천 명에 육박했던 파독 광부 중 대구경북에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 이들은 현재까지 55명이다. 처음 비행기에 오를 때만 해도 체력 빼면 남는 게 없다고 할 정도로 건장한 20대 청년들이었지만 이들도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한 60, 70대 노인이 됐다.

1961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은 우리나라는 이때만 해도 공업 발달이 부진해 대졸자 등 당시 고학력자들도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버스요금이 3원 50전, 말단 공무원 월급이 4천원이던 시절 독일에 가면 우리 돈으로 한 달에 6만~7만원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파독 광부 모집에 응했다. 대구에서도 신청자가 줄을 이어 당시 경북대 근처에 있던 직업안정소에서 경대교까지 행렬이 늘어설 정도였다.

배용찬(75'대구 수성구 신매동) 씨는 "군 제대 후 서울에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초등학교 소사를 모집하는데 대졸자 수십 명이 몰릴 정도로 취업난이 극심해 앞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며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하기에 무작정 지원했다"고 했다.

◆힘겨웠던 초기 생활

기본적인 독일어 교육을 받고 떠났지만 언어와 식생활은 이들에게 큰 장벽이었다. 한 파독광부는 "물건을 들 때 '하나 둘 셋' 하고 힘을 쓰는 우리와 달리 독일인들은 '하나 둘' 하고 물건을 들어 올렸다. 그것을 몰라 허리 통증으로 고생했다"고 했다. 우유, 소시지, 빵, 기름진 고기와 맥주 등 입에 맞는 음식이라고는 없었다.

파독 초기 생활했던 기숙사에서 나와 자취를 하면서부터는 밥을 짓거나 김치를 담가 먹기도 하고, 함께 파견된 간호사들의 손맛에 의지해 한식을 먹기도 했다. 배 씨는 "당시 독일인들은 돼지족발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마친 뒤 돼지족발을 먹는 우리를 의아하게 보던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고된 작업을 마치고 인근 술집을 찾아 시원한 맥주를 한잔 하기 위해서는 독일인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특유의 성실함으로 갱도 등 광산 작업장에서는 인정받았지만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그들만의 문화'에 섞여들기는 어려웠던 것. 양재인(68'대구 달서구 월성동) 씨는 "낯선 동양인을 경계하는 눈빛을 볼 때면 주눅이 들었다"며 "사소한 시비라도 붙을까 봐 어딜 가나 말조심, 몸조심을 해야 했다"고 했다.

◆열악한 작업환경, 부지런함으로 극복

광산에서의 작업환경은 더 어려웠다. 석탄을 캐고 갱도를 지지하는 버팀 시설을 설치하는 등 최전방에 나서는 독일인은 없었다. 언제나 한국 광부들의 몫이었다.

1965년 파독됐던 김정환 계명대 명예교수는 "500m 이상을 파 들어가 빛이라고는 들지 않는, 28~35℃에 이르는 갱도의 최전방에서 붕괴를 막기 위해 쇠막대로 지지하거나 곡괭이로 석탄을 캐느라 짧은 옷도 늘 땀에 절어 있었다"며 "이런 우리를 보며 독일인들도 점차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우리나라가 베트남 옆에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다.

정해진 작업시간 동안 많은 양을 작업할수록 받는 임금이 많았다. 주말에는 1.5~2배, 국경일에는 3배에 달하는 일당을 손에 쥘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 대부분은 쉬는 날도 없이 일을 했다.

조충래(76'대구 달서구 신당동) 씨는 "8시간씩 교대근무를 했지만 작업량이 많을수록 돈을 많이 줬기 때문에 한시도 쉰 적이 없다"며 "광부들은 대부분 수당을 많이 주는 주말, 국경일에도 일을 해 돈을 모았다"고 했다.

고국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는 만큼 요령도 늘었다. 한 파독 광부는 "돈을 한꺼번에 모으면 한국에 일찍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매주 로또복권을 샀지만 나중엔 환율을 살펴 외환 예금을 달러와 마르크로 교환하는 재테크까지 했다"고 했다.

◆1964년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 방문

독일인들이 일하기를 꺼리는 광산에서 대한민국 젊은이들은 근면과 인내의 표상이었다. 1964년 12월 6일 조국을 떠나 먼 나라에서 고생하는 이들을 격려하고자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광부들을 찾아왔다. 1963년 1차 파독을 시작으로 1964년 11월까지 3차에 걸쳐 파견된 광부들은 고국에 대한 향수 때문에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만 듣고도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3차 파독 광부였던 조 씨는 "한 달 남짓한 외국 생활 중에 대통령을 만나게 됐을 때의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며 "당시 대통령 비서실에서 대통령과 끌어안고 울던 것을 사진으로 찍어 한국에 있는 처가에 전달해 가족들이 안심하게 됐다는 것도 나중에 들었다"고 했다.

배 씨는 '김치'라는 두 글자만 들어도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잠겼다. 박 대통령 부부가 독일을 방문하면서 가져갔던 김치를 전달받은 때를 잊을 수가 없어서다. 그는 "한 달 동안 김치 맛을 못 봤던 파독 광부들과 나눠 먹기 위해 국수처럼 가늘게 썰어낸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었을 때 차오르던 눈물과 감동은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고난'역경 인생의 밑거름

파독 광부들은 3년 계약이 끝난 뒤에는 각자의 길을 택했다. 독일에 남아 광산 일을 계속하거나 학업을 선택하기도 하고, 미국이나 캐나다 등으로 자리를 옮겨 외화벌이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가족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못 이겨 3년 만에 돌아온 이들도 다수였다.

고난과 역경의 외국생활이 살아가는 데 밑거름이 됐다며 고마워하는 이들도 많다. 김 교수는 "광부로 일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27세였던 당시의 여권 사진을 보면 지금도 힘이 솟는다"며 "먼 곳에서의 고생이 헛되지 않게 굳게 마음먹고 대학원에 진학해 고국에 돌아와 강단에 서게 되는 기회를 얻었으니 한국과 독일 양국에 모두 감사한다"고 말했다. 양 씨는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논과 과수원을 사서 일구었으니 파독 생활은 인생에 더없는 기회였다"고 했다.

파독 광부, 산업 역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이들도 하나 둘씩 나이가 들었다. 세계 각지와 우리나라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파독 광부들을 한데 모으고 싶은 것도 그 때문이다. 배 씨는 "군소 모임을 통합해 파독광부협회를 만들었지만 크게 알려지지 않아 모르는 이들이 많다"며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이지현기자 everyda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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