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通] 정치인에서 방송인으로 강용석 前 의원

정치인 시절 갈구하던 인기 보통사람 된 지금에야 손에 잡혀

'사람이 아니므니다.'

선거에서 떨어진 정치인을 흔히 빗대서 하는 말이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정치인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괄시받는 '백수' 신세로 전락한다는 뜻이다. 화려한 조명을 받았던 정치인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강용석(44) 전 국회의원의 경우는 예외다. 각종 구설에 오르다 옛 한나라당에서 제명된 후 지난해 총선에서 낙선하며 정치계를 떠났지만 그의 주가는 오히려 상종가다.

정치계를 떠났지만 잊히지 않고 여전히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와 인터넷 공간에서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오를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케이블방송 진행자로 나서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다. 서울 마포구의 CJ E&M센터에서 강 전 의원을 만나 다양한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포기를 모르는 '불꽃 남자'

활기차고 표정은 밝았다. 다소 민감하고 직설적인 질문에도 여유 있게 받아치는 강 전 의원의 모습에는 여유와 편안함이 묻어났다. 먼저 최근 근황을 물었다. "지난해 총선에서 낙선한 후 후배들과 함께 서초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서 변호사 업무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6월부터는 종편 방송사에서 시사고발 프로의 MC를 맡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변호사 업무도 밀려드는데다 방송 일이 익숙하지 않고 시간이 많이 들어서 무척 바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방송계에 뛰어든 지 6개월 만에 완전히 적응한 모양새다. "정치인으로서의 강용석은 모든 게 절제하고 조심스러웠다면 방송인으로서의 강용석은 훨씬 자유롭고 편안합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죠."

그를 둘러싼 각종 별명에 대한 질문을 건넸다. '포기를 모르는 불꽃 남자'에서부터 '고소왕' '찌질이' '예능늦둥이' '미친 인지도' 등…. 그를 지칭하는 별명이 하도 많아 별명 자체가 별명이 되어버렸다. 다양한 별명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

"10여 개의 별명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불꽃 남자'라는 별명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포기를 모르며 치열하게 살아온 저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한데다 앞으로 제가 살아가야 할 방향이기도 하니까요." 이 같은 강 전 의원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그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은 '고소왕'이다.

그가 고소의 아이콘이 된 것은 2010년 아나운서협회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고발을 당한 이후 박원순 서울시장을 '선거법상 허위 학력 기재'로, 개그맨 최효종을 '집단모욕죄'로 고소했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였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도 형사 고발했다. 스스로 '고소 집착증'으로 모 케이블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고소한 것과 고소당한 것을 합치면 두 자릿수를 넘을 것입니다. 고소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정치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정리가 됐고 한두 개만 남았죠. 올해는 모두 정리할 생각입니다." 법조인으로서 고소를 너무 남발하는 것은 아닐까? "고소는 의원시절 집중적으로 했고 지금은 안 한다. 그러나 근거도 없이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하는 것은 아니에요. 당시 지적한 문제들이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정치는 사람을 나쁘게 해

2008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 마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화려한 이력과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막상 정치판에 들어와선 '문제아' 취급을 받았다. 특히 아나운서 성희롱 발언으로 인생의 큰 변화를 겪었다. 이어 박원순 서울시장, 안철수 전 대선후보 등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했고 고소고발을 했다. 지난해 총선에서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하기도 했다. 소속 정당에서 제명, '개그콘서트' 최효종 고소, '화성인 바이러스' 출연, '슈퍼스타K 4' 지원, 총선 낙방, 케이블 방송 MC까지…. 불과 2년 사이에 그에게 일어난 일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 강 전 의원이 정치계를 떠나 보통 사람이 되자 그제야 '안티'가 줄어들었다. 정치판을 벗어나니 한 가정의 평범한 아버지이자 보통 사람으로서 국민적 사랑과 인기를 얻게 됐다. "요즘 굉장히 행복한 일 중 하나가 안티가 많이 줄어든 겁니다. 방송을 하나씩 할수록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걸 보면 방송이 참 좋구나 싶어요. 정치인 시절에 그렇게 갈구했던 인기도 얻게 되었죠."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싸움질을 일삼던 정치인 시절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단다. "현실 정치계는 사람을 참 나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치열한 전쟁과 같아 상대를 공격하고 뭉개야 살아남을 수 있지요. 반면 방송은 하면 할수록 오히려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요."

◆한 번도 행복했던 적 없어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엘리트다. 시원한 외모와는 달리 강 전 의원의 성장기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한 번도 제대로 행복했던 기억이 없다. 그가 살던 집은 서울 마포구 대흥동의 공동화장실을 쓰는 단독주택이었고 아버지는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경기고 3학년 때 MBC '장학퀴즈'에 나가 장원을 했다. 이때 받은 장학금으로 서울대 법대에 등록했다. 대학 3학년이던 199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판사가 되려고 했지요. 성적도 좋았지만 당시 아버지가 교도소에 있었어요." 이런 이유로 우수한 사법연수원 성적에도 불구하고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꿈을 접어야 했던 당시의 아픔 때문인지 인터뷰하던 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시련은 강 전 의원을 더욱 강하게 단련했다. 2001년 아시아인 최초로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학생공동대표를 맡고 지적재산권과 정보기술(IT) 전문 변호사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약자들을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98년부터 5년간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집행위원을 맡으면서 재벌개혁, 소액주주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2001년에는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이건희 회장의 장남 이재용 씨가 삼성전자 상무보로 임명된 것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2000년에는 '소액주주 소송 전문로펌'을 만들어 대우전자 분식회계, 세종하이테크 주가 조작 관련 소송을 통해 소액주주 피해 보상을 이끌어냈다. 1998년 지리산 수해로 야영객 30여 명이 사망하자 스스로 유족들에게 연락을 취해 변론을 맡았고 결국 국가배상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변호사 시절, 그는 소수 약자의 권리를 대변하는 데 앞장선 편이다.

◆정치는 '집권' 연예는 '인기' 알고보면 다 같은 말…내 최종 꿈은 대통령 되는 것

정치에 대해 질릴 만도 하지만 아직도 그의 꿈은 정치다. 스스로 '폴리테이너'(politainer'방송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해 쌓은 인지도를 적극 활용하는 정치인을 의미)라고 칭할 만큼 정계를 떠났지만 정치에 대한 집념을 숨기지 않았다. 실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울지역에서 한나라당 지역위원장을 꿰찰 만큼 남다른 정치적 DNA를 가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정계에 복귀할 생각입니다. 지금은 정치를 할 수 없으니까 쉬고 있을 뿐이지요. 방송을 기반으로 조만간 정치계에 복귀하겠습니다." 방송 나들이도 정치의 연장이라는 설명이다. "정치와 연예는 완전히 다른 분야인 듯하지만 닮은꼴도 많다. 정치는 집권이, 연예는 인기가 목적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게 그것이다"고 했다.

최종 꿈은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정치인의 최종 목표는 대권을 잡는 것입니다. 되도록 빨리 정치에 복귀해 좋은 정치인으로 성장하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그의 자신감이 공허하게만 들리지 않는다. 서울 마포구에 공동화장실을 같이 쓰던 도시빈민의 아들, '장학퀴즈'에서 받은 장학금으로 서울대 법대 진학, 대학 3학년 때 사시를 합격한 수재, 하버드대 로스쿨 아시아인 최초 학생회장, 목포교도소 수감 중인 부친 탓에 판사 임용 포기, 전통적으로 야당세가 강한 마포구에서 39세에 당선된 여당 국회의원…. 그에게는 대권을 바라볼 만한 스토리가 있다.

매일신문 독자들에 대한 인사도 잊지 않았다. "정치권 복귀는 매일신문 독자들의 뜻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일신문은 대구경북의 대표 정론지로서 지역 여론을 대표하고 선도하기 때문이죠. 매일신문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강용석, 많이 사랑해주세요."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사진'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강용석은?=서울 출생.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고교 시절인 1987년 MBC 장학퀴즈에 출연하여 대학등록금을 지원받았다.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학생회장을 맡았다.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1997년에 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1998년 지리산 수해로 야영객 30여 명이 사망하자 스스로 유족들에게 연락을 취해 변론을 맡았고 결국 국가배상을 이끌어냈다. 이명박 대통령 후보 중앙선대위 법률지원팀장, 중앙선대위 클린정치위원회 법률팀장으로 활동하면서 당선에 기여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지난해 4'11 총선에 출마했으나 득표율 4.3%에 그쳐 낙선했다. 낙선 이후 다시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다. 지난해부터 TV조선의 '강용석의 두려운 진실', tvN의 '강용석의 고소한 19' 등 다수의 TV 프로그램 진행을 맡고 있다. 강 전 의원의 처남 윤호상 씨는 이명박 대통령의 처조카 김지현 씨와 2010년 5월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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